 |
전용기 산업부장·산업부문장 |
"전세계약을 10년 보장하는 임대차법 개정은 당의 공식 입장이 아닐뿐더러 개인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제시한 '20대 민생의제' 중 10년 전세계약을 보장하는 내용의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을 둘러싸고 거센 논란이 일었다. 임차인이 원할 경우 최장 10년까지 살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전세시장에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할 것이란 비판이 빗발쳤다. 민주당의 집권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큰 상황에서 발표했기 때문에 시장에 미치는 파장이 컸다. 결국 발표 일주일 만인 지난 17일 이재명 대표가 직접 SNS를 통해 당론이 아니라며 사실상 의제 철회를 선언하며 일단락됐다.
사실 민주당 상설기구인 민생연석회의가 지난 12일 발표한 '20대 민생의제' 리스트를 들여다보면 '전세 10년 계약권'보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규제 일변도 정책안들이 눈에 띈다.
'전세 10년 보장법' 논란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개인적으로 더 주목한 의제는 '대형마트 의무 휴업일 공휴일 제한'이었다. 민주당의 설명을 보면 "상권 보호라는 취지를 되살리고, 골목상권 공동체를 육성해 지역 기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였으나, 이 역시 현실과 맞지 않는 안(案)이란 지적이 만만치 않다. 당장 대형마트 업계 2위인 홈플러스가 경영난으로 기업회생 절차에 돌입했다. 수만명에 달하는 입점업체 종사자는 실직을 걱정하고 있다. 대형마트 업계는 쿠팡과 네이버 등 급성장하는 국내 이커머스와 '알테쉬'로 불리는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쉬인 등 중국의 C커머스에 치여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형마트 업계에 필요한 것은 규제가 아닌 육성책이다.
규제로 점철됐던 대형마트 업계가 걸어온 길에서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보인다. 반도체 산업 역시 규제로 시름에 잠겨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답변은 아직 없다. 고위 관리직, 전문직, 행정직 등 일정 연봉 이상을 받는 이들에게 연장근로수당과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 제도 도입도 논의 단계에서 멈췄다.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은 최근 정기 주주총회에서 "국회에서 국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지원을 위한 반도체특별법에 대해 협의 중으로 알고 있으며, 조만간 결과를 주실 것 같다"고 말했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민주당은 침묵하고 있다. 이재명 대표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만나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되고, 삼성이 잘돼야 삼성에 투자한 사람이 잘된다"고 덕담했지만, 반도체 산업 '주 52시간 예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말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을 걱정하지만 정작 필요한 요청은 외면하고 있다. 미국의 관세 압박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만은 TSMC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생태계를 앞세워 한국과의 격차를 벌리고 있고, 중국은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를 필두로 한국 반도체 기업을 바짝 추격 중이다. 중국 기업조차 유연한 근로환경과 고액연봉으로 인재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한국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규제에 몸살을 앓고 있다.
기시감이라는 말이 있다. 한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서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을 말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을 보면 그렇다. 이커머스와 C커머스의 협공을 받아 녹다운된 대형마트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보인다면, 너무 앞서간 기우(杞憂)일까. 사실상 전 산업이 중국에 추격당하고 잠식당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규제 틀을 넘어서 실질적 지원책과 유연한 정책 마련이 절실하다. 민주당이 통합된 수권정당의 모습을 보인다면 한국 경제가 새로운 동력을 찾는 것은 물론 그토록 바라는 중도층에 대한 '짝사랑'도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기자
Copyrightⓒ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