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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 오늘의 명언..백범 김구 Ω

 

# 오늘의 명언

얼굴이 잘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

– 백범 김구 –

 

비누를 먹는 사람..

 

때는 조선 말.
당대를 주름잡던 민씨 집안에 처음으로 비누가 들어왔습니다.

민씨 집안의 초청을 받고 온 많은 대감들은
처음 보는 이 신기한 물건에 온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손을 씻어보고, 세수하며 감탄을 연발하고
온갖 아첨을 떨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비누를 씹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대감들은 비누를 먹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수군댔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매우 진중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당신들은 얼굴에 있는 때를 씻어내려고 하는 것이지만
나는 배 속에 있는 때를 씻어내려고 비누를 먹고 있소이다.
무엇이 잘못됐소?"

그러자 갑자기 찬물을 끼얹듯 좌중이 조용해졌습니다.

바로 이분이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입니다.



겉모습을 가꾸고 체면을 다듬는 사람은 많아도
더럽혀진 마음과 욕심의 때를 씻으려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드문 것 같습니다.

거울을 보는 그 시간에
얼굴뿐 아니라 마음을 살피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버드나무는 백번 이상 꺽여도 새 가지로 올라온다.

눈 덮인 들길을 걸을지라도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을
뒤따라 오는 후진들이 이정표로 삼고 따라온다.

- 김구 선생님의 애송글 -

김구 선생의 대한민국........

김구 선생은 어떤 분이고, 그와 대한민국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누구나 알다시피 선생의 호는 백범白凡입니다.

백정과 범부에서 한 글자씩 따왔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옥살이하면서, 그는 독립정부가 되면 청사의 문지기로 뜰을 쓸고 죽을 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낮은 위치에서 독립에 헌신하겠다는 그 자세만으로 마음에 울림을 안겨줍니다.

1919년 3월1일부터 온 동포가 독립만세를 부르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 함성과 피흘림을 토대로, 그해 4월 중국 상하이에 애국지사들이 모였습니다. “민주공화제”로 다스려질 “대한민국”이 거기서 탄생했습니다. 일본은 이를 가짜정부라 칭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대한민국 정부”였습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몇십년간 주지(主持)해온 절대공로가 있습니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는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고,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을 밝혔습니다. 1919년 건국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이를 재건한 게 1948년입니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1919년부터 1948년까지의 독립운동 과정의 산물입니다.

나아가 현행 헌법(1987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통을 지켜낸 김구 선생을 삭제한다는 것은 역사 말살이고 헌법 왜곡입니다. 일제가 물러난 1945년 8·15는 불행히도 분단을 내포한 해방이었습니다.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그은 38선을 지우고 온전한 한 몸으로 독립함은 절대과제가 되었습니다. 선생이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은 “나의 소원”이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미-소 냉전에 편승한 남북의 정치세력들은 한 몸을 둘로 쪼개는 데 가담합니다.

어차피 쪼개질 수밖에 없다면 반쪽이라도 차지하자는 게지요. 그러나 선생으로서는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한 아이를 쪼개어 갖자는 엄마가 진짜 엄마일까요.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는 선생의 읍소는 솔로몬 재판에서 진짜 엄마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김구와 김규식의 북행길도, 분단을 막기 위해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겠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가능성이 아닌 당위성의 차원입니다. 북측과의 교섭도 무위로 끝난 뒤, 그들은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서울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에 안겨준 후광효과도 적지 않습니다.

선생에게 민족분단은 전쟁을 초래할 “시한폭탄”이었습니다.

그가 흉탄에 쓰러진 지 만 1년 뒤, 그의 우려대로 “시한폭탄”은 6·25전쟁으로 터지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참화를 빚은 뒤에도,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분단의 사슬에 발목잡히고 가위눌려 있습니다. 선생의 발걸음은 민족적 재앙의 항구화를 막기 위한 충정이었습니다. 현행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함을 명시했습니다. 40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 국민은 분단 아닌 통일, 무력 아닌 평화를 추진하자고 합의했습니다. 선생의 깃발을 이어가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듯 선생의 생애는 대한민국의 바탕이고 상징입니다. 현실정치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뚜렷한 이정표를 남겼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면서 발걸음을 어지럽게 말라,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는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선생의 삶을 감히 흉내 내기도 어렵습니다만, 그의 애국충정에 재 뿌리는 짓은 막아야 합니다. 선생의 헌신에 터 잡아 만들어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한 의무이기도 할 테지요.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1876. 7. 11-1949. 6. 26)


황해도 장연에서 교육활동하시던 1907년. 맨 뒷줄 왼쪽에서 4번째 망건쓴 분 오른쪽이 선생
김구선생의 휘호

不變應萬變 (불변응만변)
뜻: "변하지 않는 것으로 온갖 변화를 감당한다."


1920년 1월 1일, 상해 임정 신년 기념촬영


임시정부 경무국장(경찰청장) 재임시기의 선생


선생의 휘호....'독립자유'(獨立自由)


선생의 휘호....철혈정신(鐵血情神)


선생의 휘호....獨立萬歲(독립만세)


윤봉길 의사와 마지막 기념촬영(1932. 4. 26).... 3일후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발생했다.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한국 광복군 창설식) 에서

광복군 대표(김정숙 대원)의 선서문을 듣고 있는 광복군 대원수 김구 선생( 1940. 9.17 )


1942년 중경에서의 선생


1945년 8월 7일,

OSS 총책 도너번 소장과 한국 광복군의 한반도 국내 진공작전을 의논하면서 찍은 사진

그러나, 8월 15일 해방이 갑작스럽게 옴으로써 이 작전을 이뤄지지 못했다.


조국으로의 귀환을 앞둔 1945년 11월 3일,..임정요인들의 기념촬영


임정 환송연을 베풀어주는 장개석 총통고 함께 한 선생

왼쪽에서 두 번째 선생, 세번째가 장 총통(1945. 11. 4)


대한민국 임정요인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국민들(1945. 12. 19, 서울운동장)


대규모의 반대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에서 연설하는 선생(1945. 12. 31)

'소련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하여도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하여도,

독점 자본주의의 발호로 인하여 무산자를 외롭게 할 뿐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시장화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

우리는 진실로 국제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친선을 촉진하면서,

우리가 삼천만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가지기만 원하는 것이다.

더구나 반쪽의 조국만이 아니라 통일된 조국을 원하는 것이다.'



선생의 휘호....良心建國(양심건국)



1946년 목포

"나는 조국을 분할하는 남한의 단선도 북한의 인민공화국도 반대한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잡고 절대다수의 애국동포와 함께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만 계속 분투하겠다"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임원들과 함께 한 선생

《UN 한국 위원단에 보낸 의견서》

1. 우리는 전국을 통한 총선거에 의한 한국의 통일된 완전 자주적 정부만의 수립을 요구한다.
2. 총선거는 인민의 절대 자유 의사에 의하여 실현할 수 있게 되기를 요구한다.
3. 북한에서 소련이 입성을 거절하였다는 구실로써 UN이 그 임무를 태만히 하지 아니할 것을 요구한다.
4. 현재에 남북한에서 이미 구금되어 있으며 혹은 체포하려는 일체 정치범을 석방하기를 요구한다.

(북한에서 연금되어 있는 조만식 선생의 석방도 포함.)
5. 미소 양군은 즉시 철퇴하되 소위 진공상태로 인한 기간의 치안 책임은 UN에서 일시 부담하기를 요구한다.
6. 남북한인지도자회의를 소집함을 요구함.



북한이 제시한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남한만의 단독선거 20여일 전에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서 가기 위해 출발하는 선생일행을 막아서는 학생시위대. 그리고 그들을 향해 훈계하고 호통치는 선생(1948, 4. 19)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축사하는 선생(1948. 4. 22)

친애하는 의장단과 각 정당, 단체 대표 여러분!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挽救)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토(商討)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이와 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은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하(目下)에 있어서

통일독립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는 소위 단선단정입니다.

그러므로 현하에 있어서 우리의 공동한 투쟁목표는

단선단정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현하에 있어서만 조국을 분열하고 민족을 멸망하게 하는 단선단정을 반대할 뿐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방지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선단정 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고 모인 이 회합은

반드시 전민족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하여야 할 것이니,

이 회의는 반드시 성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단결적 정신으로써 백사에 개성포공(開誠佈公)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도 확신합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복잡다단한 바 있으나,

우리의 민족적 단결로써 국제간의 친선과 양해와 내지(乃至) 투쟁에 노력한다면

모든 것을 호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만일 우리의 노력으로써 국제관계를 호전한다면 세계평화에 대한 공헌이 또한 불소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통일독립을 완성하며 세계평화에 큰 공헌이 있기 위하여 이 회의의 성공을 절망(切望)하며

아울러 여러분의 건투를 축도합니다.


1949. 6. 26 오후

선생의 저격소식을 듣고 몰려온 시민들을 경교장 2층 저격현장에서 촬영한 사진


대한민국의 첫번째 국민장이 된 선생의 장례식(1949. 7. 5)



서거 20주년이 되는 1969년에 서울 남산에 세워진 선생의 동상

백범 선생의 동상을 세운 뜻 ..

한국의 독립운동을 일으킨 무수한 애국지사 중에 백범 김구 선생은

어둔 밤 하늘에 만 개 별을 거느리신 북두칠성이요,

서리 찬 눈보라 속에 낙락장송을 이마에 인 태산교악의 자세였다.

선생은 나라가 광복된 후에 두동강으로 끊어진 남북을 통일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나 통일대업을 이루지 못하신채

1949년 6월 26일 정오 철천의 한을 품고 순국하시니

우리들의 슬픈 마음 그지 없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선생의 순국 20주년을 맞이하여

만대의 사표이신 선생의 위대한 모습을 동상으로 하여 이곳에 세운다.

백대의 후생들에게 그 의로운 기풍을 본받게 하려는 뜻이다.



선생의 또 다른 휘호들....弘益人間(홍익인간)과 敬天愛人(경천애인)


1997년 서울에 개장한 '백범 기념관' (관람료 무료)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한민족의 노래

피아212 ♪♥

광야에서 - 노찾사

래듣기 릭==>>



 

전국민의 필독서인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도 넓은 의미의 유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독립운동은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책은 선생 자신이 독립전선에서 죽었을 경우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두 아들에게 알리기 위해 쓴 글이니까요. 두 아들 (김인, 김신)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仁) 신(信) 두 어린 아들에게-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水陸) 5천 리를 떠난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릴 수 없으매 그 동안 나의 지난 일을 대략 기록하여서 몇몇 동지에게 남겨 장래 너희가 자라서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 할 때가 되거든 너희에게 보여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

…중략…

내가 내 경력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기는 것은 결코 너희더러 나를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 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와 고금의 허다한 위인 중에서 가장 숭배할 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너희가 자라더라도 아비의 경력을 알 길이 없겠기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되는 것은 이 책에 적는 것이 모두 오랜 일이므로 잊어버린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도 보태거나 지어 넣은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 믿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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