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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李完用)
1858년 음력 6월 7일 ~ 1926년 양력 2월 12일)은 대한제국의 외교관, 정치가이자 관료이다. 개화파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신교육을 받고 주미공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제국 내의 미국 전문가로서 내각의 실세가 돼 대미협상을 전담했지만, 정작 미국이 제 잇속만 챙기고 대한제국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일시적으로 실각당하기도 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결정적이 되자 친일파로 변신,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 을사조약을 체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시켰으며, 1907년 헤이그(Hague, ヘイグ) 만국평화회의 사건을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고, 정미 7조약에 서명하여 행정권을 일본에 넘겼다.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맺어 사법권마저 일제에 넘겼으며, 1910년에는 최종적으로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여 철저히 일제의 주구가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融化)'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정책에 호응하여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또한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 투쟁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경고문을 3차례에 걸쳐 발표하면서 만세 운동이 불순 세력의 선동에 의한 무지한 백성들의 허망한 경거망동일 뿐이다라고 비난했다.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받았고, 1919년에는 후작에 올랐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가운데 한 사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이며 본관은 우봉이다.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현재의 판교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이석준이고 생모는 신씨(辛氏)였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 이공정의 후손이었다. 이공정의 아들 이자성은 고려-몽골 전쟁 때 몽골 제국의 장군 살리타이의 침입을 막고 경주농민봉기를 진압, 문하시중을 지냈고 그의 집안은 조선에 들어와서도 15대조인 이길배(李吉培)가 태종(太宗)때 해서관찰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 40명, 우의정 1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한 대표적 양반 씨족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먼 직계 조상들은 고관을 역임했는데[6], 16대조 이교는 판서, 15대조 이방년은 밀직부사, 14대조 이순은 감사를 역임했으며 성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였다. 11대조 이세명은 을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한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과 8대조 이우는 명예직인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제수[7]되었는데, 그후 이완용의 직계에선 더이상 문무 양과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양반 상태였고 가난하였다.
이완용은 6살 때 아버지 이석준에게 글을 본격적으로 배웠고 10살 때인 1867년에 일가 아저씨뻘인 중추부 판사 이호준의 양자가 됐다. 이호준에게는 서자(庶子) 이윤용(李允用)과 딸만 있었을 뿐, 정실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은 없었다.
이호준은 이조참의(吏曹參議),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등 최고위직을 지낸 관료이자 흥선대원군의 친구였으며, 사위 조성하(趙成夏)는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 게다가, 이호준의 친아들이지만 서자로, 이완용에게는 나중에 의붓형이 되는 이윤용(李允用)이 흥선대원군의 서녀(庶女)와 결혼하여, 이호준 가문은 황실과 이중삼중의 연으로 맺어진 명가였다.
특이하게도 이호준의 가계는 약 350년 전인 대사성(大司成) 이승녕(李承寧)의 손자, 참봉 이영준(李英俊)때부터 후사가 없어 양자를 들인 이후, 8번이나 양자로 명가의 대를 이어 왔다. 보통 우봉 이씨 집안에서 해당 항렬의 차남 이하 남자아이들 중 가장 똑똑한 아이가 뽑혀왔다는데 정작 이호준 자신 역시도 뽑혀온 양자였다 이호준은 이완용의 친아버지 이석준과 족보상 촌수로는 32촌으로 매우 먼 친척이었는데, 아들을 잘 키워준 보답으로 선공감(繕工監)감역관(監役官-정9품) 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이완용이 양자로 입적되던 1867년은 병인양요가 있은지 얼마되지 않았고 조선이 국제 무대의 위협에 위태로울 때라 민심이 한참 흉흉하던 때였다. 국론은 척양(斥洋)으로 단단해졌지만 삼정의 문란은 계속 되었고, 단지 수면 아래로 숨었을 뿐인 막강한 안동 김, 풍양 조씨등의 세도가들과 흥선대원군의 암투가 계속 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명성황후가 막 왕비가 되었던 때로 민씨들까지 조정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당시 예방승지(우승지,右承旨)로 왕실의 비서실장 격이었던 이호준은 흥선대원군의 최측근으로서 서울 조정을 비울 수가 없었고, 아직 한창때이긴 했어도 어느덧 집안의 제사를 이을 적통 후사를 생각해야 할 40대 중후반의 나이였다.
이완용은 양아버지 이호준의 주선으로 충청북도 전의군의 선비 정익호에게 사사(師事)받고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배웠다. 13세가 되던 1870년 3월에는 한살 연상인 양주 조씨 조병익(趙秉翼)의 딸과 혼인했다.그 후 16세 때부터는 명필 이용희를 초빙, 친구와 함께 서예를 익혔는데이 때 양아버지 이호준이 전라도 관찰사로 전주에 부임을 갔으므로, 이완용은 때때로 전주감영에 내려가 문안했다고 한다. 그의 전주행에는 스승 정익호와 이용희가 동반할 때도 있었다
어릴적 이완용은 숫기없이 목소리는 낮았으며 말은 반드시 생각한 후에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했다한다. 그는 평소 말이 급하면 항상 실수하기 쉽다고 늘 스스로 경계했는데 너무 지나친 듯하자, 양아버지 이호준은 "너는 어떤 일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 너무 적어 마땅히 설명해야 할 것도 이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남자로서 처세에 대단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는 습관이니 고쳐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동료간에 모인 자리에서도 농담이나 객설에 구애받지 말고 하도록 노력해 보아라"고 일깨워 줬다한다.
이호준 가문은 대대로 노론이었다. 이조판서를 지낸 6대조 이만성(李晩成)은 노론의 태두(泰斗) 우암 송시열의 제자였고, 본래 서인이었던 우의정 이숙(李䎘,1626년 ~ 1688년)의 차남으로, 숙부 이영(李翎,1615 ~ 1637)의 양자가 되어 뒤를 이었다. 그 역시 예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의 문하생이었고, 또한 이만성 본인의 친형 이만창(李晩昌,1654~1684)의 아들이 당대 노론의 영수(領首)였던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였다. 당연히 이완용 역시 서울의 노론 서당에서 글을 배웠다는데, 누구 서당의 문하생이었는가까지는 알려진 바 없다.
21세 때부터는 평안북도 태천군의 선비 박세익에게 수년간에 걸쳐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등 3경을 반복 강습받았다.말수가 적으면서도 상당히 꼼꼼하였고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해야 된다고 믿었을 때는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 달성하려 했고 학업 성취도가 매우 빠른 편이었다 한다. 이 사이 그의 친아버지였던 이석준과 양어머니 민씨가 차례로 사망해 몇 년간 시묘(侍墓)를 하기도 했다.
1882년, 25세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 별시에 병과(丙科) 18위(전체 28위 해당)로 급제한 후, 주서(注書-정7품)가 되었다. 갑과(甲科)나 을과(乙科) 급제자도 아니고 더구나 그보다 급이 한두급 낮은 병과(丙科)에서조차 1등이 아니었데도 정7품으로 바로 임명된 것이 특이한데[18], 이완용이 과거 급제했을 당시 그의 후견인이었던 양아버지 이호준의 벼슬은 정2품 이조판서였고 고종(高宗)의 총신(寵臣)이었다.
이완용은 당시 젊은 엘리트라면 출세 가도에서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규장각 대교(待敎-정7품, 겸직가능)를 겸직했고 그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정6품),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정5품) 등 핵심 요직을 거쳐 외직(外職)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로 나갔다.
1886년에는 중앙정계로 다시 복귀,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료교육기관이었던 왕립육영공원(王立育英公院)에 입학하여 영어등과 서양 철학과 과학등으로 재교육을 받으면서 신문물을 접했고 이 때 뛰어난 성적으로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정4품),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정4품) 등으로 승차했다.
이듬해엔 세자시강원(世子施講院) 보덕(輔德-정3품)에 보임되어 왕세자 순종(純宗)을 가르쳤다. 정3품에 오르기까지 과거 급제부터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신문물에 밝은 젊은 인재들이 파격적으로 중용된 고종 치하에 가능했던, 조선 역사상 실로 유례없이 빠른 승진이었다.
1887년에는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발령되었다. 1887년 미국에 갔다가 1888년초 병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귀국후(後) 미국이 일본, 러시아, 중국과 달리 한반도 지배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미국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그렇지만 정작 미국 문명의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 할 노예제 등 신분제의 철폐나 자유인권적 헌법, 참정권 등의 입헌의회정치(立憲議會政治)을 도입할 그 어떤 식견이나 의견 표명, 노력도 없었다. 즉, 근대 국가 건설에 가장 기초가 될 것들에 대한 인식은 결여돼 있었다.
1888년 음력 5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임명을 시작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외무참의 등을 지냈다. 1888년 음력 12월에 다시 주차미국참찬관으로 미국에 건너갔다가 12월에 주미대리공사로 승진하여 2년간 근무하였다.
1890년 음력 10월에 귀국하여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형조참판(刑曹參判)·공조참판(工曹參判)·동지의금부사(義禁府使)·동지성균관사(成均館使)·동지춘추관사(春秋館使)·전환국총판(典圜局總辦)·우부승지(右副承旨)·내무참의(內務參議)등 각종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고 대한제국내각의 대미협상을 도맡았다.
특히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 재임당시 근대 교육개혁을 주도했는데,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제도화하고, 근대적 교사 양성사업 계획을 지휘했으며 조선의 국립대 격인 성균관의 커리큘럼을 개편하여 지리, 산술, 과학등 서양 학문 이수 과목을 신설하고 정기적인 시험 제도의 개정을 주도했다. 이는 정부 주도로 이뤄진 최초의 교육 근대화 시도였다 할 수 있었다
1893년엔 친어머니 신씨(辛氏)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모친상을 지켰다. 당시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착 및 열강의 각종 이권과 국권 침탈 기도등 각종 국가 위기가 닥쳐있는 판국이라, 모든 걸 미루고 일단 다시 관직에 나오라는 개화파 내각의 강한 권유가 있었으나 이완용은 거절했다. 다만 탈상 후 1895년 음력 5월 학부대신(學部大臣) 겸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복직한다.
그는 과거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1차로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이후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식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친미 개화파가 되었지만, 서구 열강의 무력에 의한 강제 개항 방식에는 그 역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반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은 생애 없었으며 왕정을 지지했고 공화정을 싫어했다.
이후 정동파(貞洞派)에 가담하여 러시아 세력에 접근하기 시작하는데, 그 계기는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때 일본인들의 만행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이었다. 사변 당시 그는 주한미국서기관 호레이스 앨런(Horace Newton Allen, 1884~1905 재한)의 도움으로 미국공사관으로 일단 피신하였는데, 시해사건 직후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이완용은 1896년(건양 1년), 미온적인 미국 대신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러시아어: 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와 함께 아관파천을 기획하게 된다.
1896년, 마침내 이완용은 일본과 청나라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외부대신(外部大臣)에 올라 대한 제국의 러시아 협상까지 전담하게 됐다. 이 때문에 그를 친러파로 분류하는 의견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견제에 적극적이었던 러시아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것 뿐이었고 그는 친미파(親美派)였다[23]. 아울러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등을 겸직, 제국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데 이는 러시아를 이용, 일본을 견제하고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인정받으려던 고종과 개화파 내각의 위기감 때문이었다.
윤치호
(윤치호는 친러파와 친일파로 변절한 그를 평생
경멸하였다.)
이어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도 가담하여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안경수 등과 함께 계몽강연 활동을 나선다. 그는 독립협회 내 정부측 인사로서 독립협회 제2대 위원장으로까지 활동했는데, 다음은 그의 연설 중 일부분이다.
| “ |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란다. | ” |
그는 조선 시대 내내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곳으로 조선 사대주의의 구태로 지목됐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독립문을 설립하도록 뜻을 모았다.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았던 시절에는 독립신문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그야말로 독립협회 내 핵심요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윤치호(尹致昊), 서재필(Philip Jaisohn), 이승만(李承晩) 등이 국민 투표를 통한 미국식 참정권을 주장하여 황실과 유생(儒生)들의 경계와 이목을 끌자, 자칫 역모의 죄를 뒤집어쓸까봐 이완용은 협회 명단에 이름만 남긴채 모든 간부직을 사퇴했다.
독립협회의 모토이자 하부조직인 협성회(協成會)에는 이완용의 장남인 이승구(李升九)가 창립회원이자 동지 중 한사람으로서 활동중이었는데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 버렸다.
아관파천등으로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 제국은 대한 제국 조정에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고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해왔다. 당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더이상 국제 사회에서 위신이 떨어져서는 안됐다. 이완용과 대한 제국 내각은 자칫 러시아가 침공해올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영흥·길주·삼수·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 양도 요구를 거부했으며, 군사교관을 보내겠다 일방적으로 통보해왔을 때에도 강력히 거부하였다.
황실과 내각은 미국통이었던 외부대신(外部大臣) 이완용의 주장대로 미국 쪽으로 줄을 댔다. 아관파천 때 이완용을 도왔던 주한미국공사 알렌(한국명:安連)을 통해 각종 이권을 헐값에 넘겨 어떻게든 미국의 영향력을 이용해보려 했고 아울러 러시아 세력 일소 목적의 2차 파천 계획, 소위 미관파천(美館播遷)을 제안했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외교기조는 고립주의였고 러시아 제국과의 충돌을 우려, 거부 의사를 표시해왔다.
각종 이권을 매우 헐값에 마구 넘겼음에도 미국이 제 잇속만 차리고 대한 제국 황실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이완용의 능력은 결정적으로 의심받게 됐다.
한편, 러시아는 조선의 대미 접촉에 분노와
위기감을 느꼈고, 이에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1897년 7월 20일 이완용을
학부대신(學部大臣)으로, 재차 9월 1일자로 외직인 평양 관찰사로 좌천시켜 중앙 정계에서 축출시켰다.
좌천 이튿날인 9월 2일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의 후임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로 부임한 스페에르(Speyer, A. de.)는 고종(高宗)에게 '(이권을 넘기지 않으면)궁궐 경비병을 철수한다','제2의 아관파천을 하겠다'는 등 협박했다. 미국인 헤링튼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페에르는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 | 그는 내가 아는 중에서 가장 질나쁜 인간이오. 나는 그의 이름에 표를 해 두었소. 그는 내 재임하는 한 결코 내각에 돌아오지 못할 거외다. 그는 언제나 독립하자면서 떠들지만 하는 짓은 친미(親美)에 지나지 않는 그룹의 우두머리지요. 나는 그 그룹을 조선에서 없애버릴 작정이니, 그들은 더 이상 함을 쓰지 못할 게요. | ” |
러시아의 압력에다 대미 협상의 실패의 책임을 지고 내각에서도 차츰 밀려난 그는, 급기야 1898년 3월 11일에는 전북 관찰사로 좌천됐다. 부임 5일만에 직무태만 혐의로 감봉 처분을 받았고, 공금횡령죄까지 뒤집어써 그나마도 파직될 뻔했으며 그해 7월 11일에는 아예 독립협회로부터 제명당하기까지 이른다.
1901년 2월에는 사면받고 다시 궁내부(宮內部) 특진관(特進官)으로 복직됐지만, 의정부(議政府) 참정(參政-정1품)이던 양아버지 이호준의 사망으로 의원면본관(意願免本官)하고 낙향해야 했다.
탈상 후 1904년 2월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이 때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져가는 시점이었는데. 세계 어느 누구도 감히 예상치 못했던 일본의 승리에 당황한 대한제국은 국권 침탈의 중대한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대한 제국은
마지막 보루로 다시한 번 미국을 택했고, 이완용을 재기용해 미국공사관으로 재차 파천할
목적으로 미국과 비밀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일본어:
| “ |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 ” |
이완용은 이제 일본의 철저한 대리자로 변신함으로써, 미국에 이권을 넘기는 과정에서 착복했던 부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엄청난 특권과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1905년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특파대사 이토(伊藤博文)로부터 지시를 받고, 일본군의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어전회의를 열어 고종을 협박, 을사조약에 서명하게 했다. 많은 유생들이 을사오적 이완용을 처벌하라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그는 '시국에 따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조선의 외교권은 힘을 키워 다시 도로 찾으면 된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905년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후원으로 의정대신(議政大臣)을 겸직하고, 1907년 초 대한제국 내각 최고직이었던 의정부(議政府) 참정대신(정1품)에 올랐으며, 조선 근대화 작업을 위해 겸하고 있었던 농상공부 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에 유임됐다.
1907년 6월에는 일본과 본격적인 강제병합 준비를 위해 개편된 내각 최고직인 총리대신에 추천되었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총리대신직을 거부하였으나 조선통감부[30] 통감 이토의 거듭된 권유로 결국 수락한다.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했다. 또한, 그는 어전회의에서 항일 의병장 허위(許蔿, 1854년 4월 1일 ~ 1908년 10월 21일)의 처형을 순종황제에게 상소한 사실이 알려지자 화가난 민중들이 처음으로 그의 집을 불태웠다. 그래도 처음 화재 때는 조기에 발견 진압하여 조상들의 위패와 재산의 대부분은 소실을 면했다.
1907년(융희 1년) 총리대신 취임 초 그는 자신들에게 향하던 양반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과거 조선이 당쟁으로 억울한 희생자를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남인, 북인등 역대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조선 정계에서 축출됐던 다수의 복권을 시도한다. 이는 거꾸로 벽,시파 서인 중심의 주류 유학계의 집단 반발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국권 침탈을 놓고 고조되던 양반들의 분노를 흩어놓는데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1908년(융희 2년) 4월에는 예정대로 77명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이완용 등의 건의로 사면복권된 명단은 아래와 같다.
한효순(韓孝純), 정인홍(鄭仁弘), 목내선(睦來善), 이현일(李玄逸),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耉), 조태억(趙泰億), 최석항(崔錫恒), 유봉휘(柳鳳輝), 김일경(金一鏡)
김중기(金重器), 김도응(金道應), 정후겸(鄭厚謙), 김하재(金夏材), 안기영(安驥泳), 권정호(權鼎鎬), 조중호(趙中鎬), 김익순(金益淳), 이희화(李喜和), 민암(閔黯)
이의징(李義徵), 한세량(韓世良), 신치운(申致雲), 이징옥(李澄玉), 원용성(元用星), 허욱(許煜), 이주회(李周會), 이진유(李眞儒), 정해(鄭楷), 서종하(徐宗廈), 윤성시(尹聖時),
박필몽(朴弼夢), 이명의(李明誼), 이사상(李師尙), 윤연(尹㝚), 윤취상(尹就商), 이명언(李明彦), 김중희(金重熙), 권익관(權益寬), 윤상백(尹尙白), 윤지(尹志),
이하징(李夏徵), 유수원(柳壽垣), 심악(沈䥃), 박찬신(朴讚新), 조동정(趙東鼎), 이거원(李巨源), 이명조(李明祚), 권형진(權瀅鎭), 윤휴(尹鑴), 윤원형(尹元衡)
이동양(李東讓), 이범제(李範濟), 이공윤(李公胤), 이중술(李重述), 이하택(李夏宅), 이보욱(李普昱), 김호(金浩), 박필현(朴弼顯), 박태신(朴泰新), 정권(鄭權)
조현빈(趙顯彬), 심유현(沈維賢), 권첨(權詹), 이사로(李師魯), 밀풍군(密豊君) 이원(李垣), 이재화(李在華), 이우화(李宇和), 권숭(權崇), 김정관(金正觀), 김정리(金正履)
정사효(鄭思孝), 권집(權䌖), 김주태(金柱泰), 김윤(金潤), 채동술(蔡東述), 박홍구(朴弘耉), 박홍도(朴弘道)[31]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
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일본어:
가만 있을 수 없었던 고종은 1907년(광무 11년) 헤이그(Hague, ヘイ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을사조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해보려 했으나 어쩔 수 없는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좌절해야 했다. 일본이야말로 자기들 뜻대로 순풍에 돛단 듯 가는 줄 알다가 불시에 크게 놀라, 일본 내에서도 당시 온건파로 분류되던 이토 히로부미등을 질책하는 여론이 일어났고, 원래 계획보다 훨씬 앞당겨 일한병합을 서둘렀다.
일본은 이완용과 친일 단체들을 앞세웠다. 이완용과 일진회(一進會) 송병준 등은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 양위할 것을 강요해 순종이 일본의 의도대로 즉위했다. 고종 퇴위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일 의거들을 탄압하고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이완용은 주한주차일본군사령관(駐韓日本軍司令官)이자 통감대리였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 ~ 1924)와 긴밀히 협의했다.
특히 직접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 제도를 제안하여 조선인 앞잡이로 일본 헌병을 도와 항일의병들을 토벌케하는 반민족 행위를 자행했다.
1907년 7월 19일 이완용은 양위에 관한 고종의 조칙이 내려진 그 날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강제적인 양위에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튿날 이완용은 박영효의 공석을 맡아 궁내부대신 서리로서 양위식을 강행시킨다
1907년 7월 20일 순종 즉위식으로 공표된 그 시각, 반일 단체인 동우회(同友會)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 1차 화재 때와 달리 이번엔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과 집안 패물들이 모두 타버려 거의 전재산이 불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그가 집안의 적장자로서 제사를 모셔야될 조상들의 신주까지 몽땅 불 속에 사라지는 바람에 정신적인 충격도 상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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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군중들의 방화로 집은 불타고,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는 그들에게 쫓겨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왜성구락부(倭城九樂部)로 몸만 피했다.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이완용과 친일 관료들은 덕수궁에서 순종 즉위식을 주관 중이었다[33]. 즉위식 당일, 일본에의 분노가 이완용에게로 옮아 붙으면서 반이완용 데모와 화형식은 서울 말고도 전국 각지 백성들이 모이는 곳마다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순종 즉위식 도중 덕수궁으로 몰려온 군중들이 일본 헌병대에 가로막힌채 '이완용을 죽여라'라고 외치는 함성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사태를 깨닫고 당황했다. 그와 내각 관료들은 궁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쩔쩔매는데, 헌병대가 통과시킨 각 신문 기자들과 관료들이 전국 각지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을 속속 알려왔다. 이토(伊藤)는 헌병대의 호위를 붙여 이완용을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 통감 관저로 갔다. 왜성대의 통감 관저는 1926년 광화문에 조선 총독부 신청사가 들어서기 전까지 초기 조선총독부 역할을 했는데 이곳에 먼저 피신 와있던 이완용의 부인 조씨가 후일 회고하길 첫 1주일간 모든 비용을 이토가 모두 댔다고 했다
1907년 9월 이완용과 그 가족들은 왜성대에서 두 달 가량 머물다 종로구 장교동에 있었던 같은 친일파이자 그의 의붓형인 이윤용의 집으로 들어가 신세를 졌다[34]. 양아버지 이호준의 대부분의 재산은 친아들인 서자(庶子) 이윤용에게 상속이 됐고, 양자인 이완용은 집안 제사를 직접 모시는 적자로서 의무를 다해왔기 때문에, 의붓형이었지만 그의 집에서 지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한다.
1908년 1월 의붓형집에서 서너 달을 지내던 이완용은 겨우 궁리끝에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高宗)이 직접 저동에 있는 남녕위(南寧衛)궁(宮)을 자신에게 하사한다는 식의 정치적 연출로 사태무마를 시도하기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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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헌병들의 출동으로 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 1860 ~ 1919)은 순종 즉위식에 나타나지 않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새 황제 순종에게 올렸다.[34] 이완용은 상소문에서 '이번에 황제의 위를 물려준 것은 태황제의 순수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며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 없다 그런데 박영효가 그 직책을 회피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사태를 완전히 왜곡했다.
순종은 일단 윤허했다. 이에 박영효는 역시 황제 대리 의식 집행을 거부한 시종원경 이도재, 전 홍문관 학사 남정철과 함께 법부에 구속되었다. 이때 감옥에 갇힌 박영효가 배탈이 나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가 그를 달래보려고 직접 서양식 약을 보냈으나 박영효는 한국에도 약이 있다면서 되돌려 보냈다. 그는 경무청에서 심문을 받으며 "총리대신 이완용을 역적이라 했을 뿐 나는 무죄다"고 호통을 쳐봤지만 결국 유배형에 처해져 제주도로 귀양갔다. 그렇긴 했어도 순종 황제는 제주도 밖으로 이동해도 죄를 묻지는 않겠다고 뒤로 밀지(密旨)를 따로 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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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이 즉위한 뒤, 정미칠조약에 서명하여 내정권을 스스로 일본에 넘겼다. 정미조약 체결의 원흉인 정미칠적 명단에는 이완용의 맏며느리 임건구의 친삼촌인 사돈 임선준(任善準)의 이름 역시 확인되고 있다.
8월에는 매국친일(賣國親日)의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대훈위국화대수장(일본어:
국화대수장은 일본 황실이 현재도 수여하고 있다. 역대 수훈자 목록에서 한국인의 이름은 현재까지 4명이 확인되는데 조선 왕족들인 순종의 황태자이자 마지막 황손 영친왕 이근(李垠), 의친왕의 장남 이건(李鍵), 그리고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폭사당했으며, 요근래 국내 네티즌 사이에서 미남 왕족으로 인기를 끌었던 의친왕의 차남 이우(李鍝) 공(公)등 3명이 명단에 올라있고, 왕족을 제외하고는 이완용이 유일하다.
순종(純宗)이 정식으로 황제가 되자 이완용은 왕실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식이 없었던 순종황제의 세자로 반일적 성향의 다섯째 동생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1877 ~ 1955)이 아닌, 아직 10살 꼬마였던 막내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1897 ~ 1970)을 점찍었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高宗)은 이완용의 추천대로, 후사가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순종황제의 막내 동생 영친왕을 결정하였다. 당시 다음 대권의 유력 주자로 물망에 올랐던 흥선대원군의 적장손(嫡長孫)이자 자신의 장조카였던 영선군(永宣君)과 장성(長成)한 아들 의친왕을 견제하여 끝까지 실질적인 막후 권력을 쥐려했던 고종(高宗)의 의도와 이완용의 정략(政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의 대우와 주목을 받아왔던 영선군과 의친왕은 졸지에 황태자의 신하로 격하(格下)되었다.
한편 왕위계승문제에까지 개입한 그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시각은 악화되었고, 그가 권세를 부리며 온갖 참견을 시작하자 양위를 같이 주도하던 사람들조차 등을 돌리게 되었다.
1909년 7월에는 이완용의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일본과 교환,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이완용은 망국노, 역적이라는 질타를 받았고 반(反)이완용 시위, 이완용 화형식이 곳곳에서 거행되었다. 특히 일본 정부 요인들과 매국노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을 암살하기 위해 암살단이 곳곳에서 꾸려졌고 이완용은 언제나 그들의 1번 타겟이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됐다. 이완용은 11월 4일 서울 남산 장충단에서 열렸던 이토 통감 추도회에 침통한 표정으로 참석했다. 추도회는 일본 현지의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과 동시에 거행됐는데, 시종원경(侍從元卿) 윤덕영,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 대표 윤효정 등이 대표로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추도문을 읽는 자리에서 이토 공은 자신의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가 제창한 극동평화론(極東平和論)의 뜻을 지지하고 존경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1879년 9월 2일(황해도 해주) - 1910년 3월 26일)를 조선인의 이름으로 맹렬히 비난했다
1909년 12월 22일에는 앞서 17일에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 2세의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인력거에 올랐다. 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던 이재명 의사(義士)가 이완용을 덮쳤다. 그러나 인력거꾼이 앞을 막아 둘이 실랑이를 벌이는 통에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등을 3차례 찌르는 데 그쳤다. 그는 인력거에 앉은 이완용을 재차 찌르려했지만, 출동한 일제 경찰이 찌른 칼에 넓적다리를 맞고 체포됐다.
인력거꾼 박원문은 자상(刺傷)을 입고 그 자리에서 절명, 이재명 의사는 이듬해 9월에 이완용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 및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이완용은 특히 칼에 왼쪽 폐가 관통됐는데, 마침 일본인 치료목적으로 파견와있던 일본인 외과의사들과 당시의 최신의료기술을 총동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다만 이때부터 얻은 폐쪽의 지병이 천식과 폐렴으로 발전, 죽는 날까지 추워질때마다 크게 고생했고 결국 그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어쨌든 이완용은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1910년 8월에는 일본이 정해준 각본대로 총리대신의 자격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가 소집되자 뻔뻔하게도 왕이 직접보는 앞에서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가 설치되자 22일에는 스스로 전권위원이 되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관사로 찾아가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 병합 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조약체결후 얼마안가 이완용은 곧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伯爵)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당시 일본돈 1원은 조선엽전 1천닢과 같은 가치였다고 한다,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금 15만 원을 지급받았다.
한일병합이후, 백작이 된 그는 1912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주장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직접 문안인사를 갔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해 7월 11일 농사장려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15년 10월 13일 조선농회 회두(會頭)로, 16년 7월 30일에는 이무회의 회두로 선출됐고, 1918년 5월 25일에는 조선귀족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1월 15일에 고종 황제가 승하했다. 시중에 독살설이 떠돌았는데, 고종 양위를 강요했던 친일파들, 특히 이완용이 그 배후로 지목됐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승하(昇遐)와 국제 연맹에서의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년 12월 28일 ~ 1924년 2월 3일)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호응해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역시 민족지도자들로부터 동참을 요청받았으나 오히려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탄압 필요성과 그 방안에 관한 편지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다. 이완용은 공식적으로 경고문을 연달아 3회 발표하고, 3·1 운동이 불순세력에 의한 불순한 난동에 불과하며,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기도는 허망할 뿐이라며 망언했다.
1920년에 일제는 3·1 운동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려주었다. 일제 치하에서 그의 입지는 일본 황실로부터 훈장과 작위를 받으면서 더욱더 확고해졌다.
1921년에는 조선인 귀족 명부 관리 기관인 중추원(中樞院) 고문 겸 부의장을 지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본어 보급을 독려했으며,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총독부 교육조사 및 산업조사위원,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등 친일단체들마다 깊숙히 간여하여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한반도 수탈을 음으로 양으로 돕는다.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 이완용이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영일시(詠日時-해를 찬양함)를 인용, 일본을 찬양했던 구절
1922년 3월 14일에는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1923년 1월 6일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이 되어 한국 역사를 일본의 시각에 껴맞춰 해석, 왜곡하는 이른바 친일사관을 정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男爵)이 되어, 조선인으로는 거의 드문 부자귀족(父子貴族)이 되기도 했다.
1935년 당시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됐다.
이완용과 핵심 친일파들 몇몇은 일제시대 내내 승승장구했던 반면 다수의 귀족들과 나머지 양반들의 형편은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비참해졌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상당수의 귀족들이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상금을 받았지만, 일본의 수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일어난 인플레로 가만히 있어도 금방 돈의 가치가 떨어졌고, 그나마도 무위도식하거나 타락해서 방탕한 생활로 몰락해 가는 판이었다.
대부분 세습 대토지로 사치를 누려온 그들이었지만, 일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공산품에 비해 농업의 가치는 나날이 떨어져가기만 해서, 계속 토지에 의존했던 그들 가운데는 이미 파산 지경에 이르러 품위 유지는 물론 생활조차 꾸려나가기 힘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왕실과 연이 닿았던 이들중에는 창덕궁으로 몰려가 전 황제 고종, 순종 부자에게 가세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며 용돈을 타서 생활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기술한대로 이완용은 매년 겨울철만 되면 해소(咳嗽)와 천식, 폐렴과 흉통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일본에서 의사들을 불러 그 후로도 계속 정기적인 진료를 받았으나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시들어가는 몸과는 반대로 그의 재산은 늘어나기만 했는데, 특히 땅 재산은 1억 3천만 평까지 불어났다. 당시 조선인 가운데 왕을 제외하고 가장 부자라는 소문까지 있었지만 폐렴과 해소 증상은 어쩔 수 없었고 죽을 때까지 흉통에 시달렸다. 이런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1925년에도 가을까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의 명승지 물염적벽(勿染赤壁)을 유람하고 11월 하순에는 순종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다시 해소가 심해져 12월 5일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의 우봉 이씨 시조 이공정의 묘에서 열린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오래전 유실됐던 시조 이공정의 묘를 이완용이 손수 이것저것 챙겨 드디어 개축공사를 끝내고 원래 직접 제사를 지내려하려 했으나, 지병인 기침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졌다.
그후 얼마간 집에 들어앉아 요양을 해 어느 정도 호전됐다. 그래서 1926년 1월 12일 오전 10시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 다소 무리를 해 참석하게 된다. 조선 총독부는 그해 1월 1일 경복궁 안에 신축한 청사로 이전해 있었으며, 조선 귀족 등록관청인 중추원도 새 청사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는 새 청사가 데라우치(寺內)의 계획으로 하세가와(長谷川)가 착공한 이래 9년만에 완공을 본 당시 동양 최대의 건물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완용은 새 청사에서 열린 새해 첫 회의인데다 사이토(齋藤) 총독도 참석한다고 해서 무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그의 병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고 말았다. 부축을 받아 귀가를 했는데 밤이 되자 기침이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됐고 이내 쓰러져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2월 11일 오전 오늘이 고비라는 소식을 들은 순종(純宗)은 적포도주 한 상자를 이완용의 집으로 보냈다. 1926년 2월 11일 오후 1시 20분 이완용은 옛 주인이 보낸 포도주를 입에 대보지도 못한 채 일본인 의학 박사 두 명과 조선인 주치의, 그리고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인동 집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享年) 69세. 장손 이병길은 일본 유학 중으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1926년 2월 12일, 장례식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엄수했고, 일황(日皇)이 하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후작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正二位大勳位候爵 牛峯李公之柩)라고 적힌 장례깃발을 앞세워 호화로운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일본 순사들의 호위속에 종로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진 장례 행렬의 규모는 고종 황제 장례행렬을 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설란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설란에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기사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갔다. 보호순사의 겹겹 파수와 견고한 엄호도 저승차사의 달려듦 하나는 어찌하지 못하였다. 너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이 이때였다. 아무리 몸부림하고 앙탈하여도 꿀꺽 들이마시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날의 이 독배이다. (중략)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았지. 앙탈하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이완용은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산에 묻혔다. 어떤 근거지가 있어 택한 것은 아니고, 유명한 풍수가를 통해 점찍어둔 명당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매국 행동에 대한 앙갚음으로 인한 묘소 훼손이 두려웠던 나머지 1926년 당시에는 굉장히 궁벽한 벽지였던 낭산리 임야를 일부러 택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해방 이전에도 훼묘 사건이 종종 있어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고 해방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끊이지 않아 급기야 1979년, 직계 후손들이 아예 파묘(破墓)하여 그 유골은 화장했다. 현재 그의 묘터는 이후 채석장으로 바껴 그나마 옛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다.
1945년 해방후 이완용의 가족과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거나 돌팔매를 맞고 다녔다. 장손주 이병길은 앞서 말한대로 6.25 전쟁때 행방불명되었으며 둘째 손주 이병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또한 큰증손자 이윤형은 남은 재산을 정리해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이완용의 직계후손은 거의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아들 이항구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6.25때 행방불명된 장손자 이병길의 이름도 올라있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그는 조선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고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맞으나, 그가 있었기 때문에 왕통(王統)의 단절만은 면했다. 그가 일본과 교섭한 결과, 일제시대에도 이왕직(李王職), 왕세자부(王世子附) 등을 통해서 왕실의 명맥만은 유지가 되었으며, 왕족 대부분이 조선인 귀족으로서 일제시대에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데는 평가가 일치한다.
과거 대한 제국의 지배층들 역시 일본에 귀순한다는 조건으로 귀족 작위를 받게 했고, 멸문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다. 즉, 조선은 망했어도 왕실만은 남긴 것이다. 이는 그의 일본에 대한 기민한 외교적 대응이 효과가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내 온건파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얻어냈다. 그래서 왕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나라를 넘기는 조약 문구에 서명을 했음에도 실제로 고종과 순종 모두 그를 특별히 경원하거나 내치지 않았고 특히 순종은 이완용이 와병하는 동안 갖가지 위문품을 보내기도 했다.
같은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1945년 해방이후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하였다. 그를 매국노라 매도하긴 쉽지만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지도자가 되어 이완용같이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이어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난을 당하여 분사(憤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상계의 자극은 될 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일 뿐이다.'라며 이완용이 모든 악역을 자처했다고 변호했다. 그는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며 이완용 등은 단순히 매국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는 을사조약 때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내놓았던 일부 양심 인사들, 또한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과 엄청난 논쟁꺼리가 되었다.
한편,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며 한 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성취하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라는 하마평이 있었다.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처음 접해보는 영어와 서양 학문들 이었을텐데도 매우 우수한 학습 능력을 보여줬다. 당대 최고 평판의 서예가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독립문 현판을 직접 쓰기까지 했다. 그가 독립협회 위원장직을 지낸시절, 각종 국민 계몽 활동에 열심을 냈고 독립신문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립문 설립에 앞장서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알렸던 과거가 있었고, 당시에 한해서는 그의 독립 의지가 진심이었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첫째, 위의 긍정적 평가의 이면엔 과연 무엇을 위한 타협이었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존재한다. 나라가 없이 왕실이 무슨 소용이며 귀족들 대부분도 나중에는 고생스러운 삶을 살게 되지만, 대부분 일제에 착취당하며 곧 강제징용 및 종군위안부 등으로 학대당하게 될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애시당초 왕실과 친일파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둘째, 일본과 러시아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놓고 이리저리 애썼던 것만은 사실이나, 그에게 있어 독립이란 '근대적 국민 국가'로서의 독립보다는 왕실 보존 및 안위 문제로서의 '독립'이란 의미였다. 그 예로 미국을 끌어들이려 온갖 수를 다썼지만, 정작 미국을 본받아야 했던 보통교육, 참정권, 공화정, 노비 철폐 등은 전혀 도외시했고, 근대적 의회 정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국가로서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조건인 근대 헌법 제정등에 전혀 한 일이 없다.
셋째, 근대 개혁을 정부 주도로 하려했음에도 그 동력이 될 국가 예산이나 국가 재산 및 세수 확보에도 한 일이 없다. 있다면 각종 이권을 열강들에게 헐값에 넘겨 얻은 얼마간의 돈이었다. 그 돈이 왕실 재정과 일부 정부 요인들에게 도움은 됐을지언정 헐값에 넘긴 이권으로 열강들이 마구 국부를 유출해 가는 통에 국민의 삶과 정부 재정은 더욱더 피폐해져 갔다. 반대로 그의 재산은 현재 추산 수조원까지 불어났고 가진 땅만 1억 3천만 평이 넘었지만 국가 재건을 위해 한 일이 없었다. 을사조약 체결 직전 변명처럼 떠들었던 '나라가 다시 부강해지면 그 때가서 국권을 되찾으면 된다'는 말을 실현하기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었고, 그나마도 부정축재로 후배들과 역사에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했다.
넷째, 그의 리더십으로는 대한제국 정부 내각 내에서조차 합의를 이끌지 못하고 정적(政敵)들만 자꾸 생겼다. 한때 동지였던 윤치호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주의자 아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완용은 초창기 독립협회의 의장이었다. 독립협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우습지만 일본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 윤치호 일기 내용 중에서-
또한, 이완용의 조카이자 이완용의 비서직으로 있던 김명수가 이완용을 기리기 위해 1927년 《일당기사(一堂紀事)》를 펴냈는데, 《일당기사》 내용 중에서 이완용의 가치관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나는 20세 때에 한학(漢學)을 숭상하고 산림학(山林學)에 종사했으나 존도숭유(尊道崇儒)의 풍이 퇴색하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되어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여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구미(歐美)로 갔다. 최초에는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그가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의 칼을 맞고 입원중, 자신을 간호하던 맏며느리 임건구와 간통을 하여 장남 이승구가 자살하였고, 며느리는 이완용이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패륜적 성추문마저 기록돼 있다.
《일당기사(一堂紀事)》
이완용이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의 칼에 찔렸을 당시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에서 일본인 의사로부터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던 기록이 2008년 12월에 발견되었다. 서울대학교 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이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의 칼에 찔렸을 당시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에서 일본인 의사로부터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던 기록을 발견했다”고 2008년 12월 18일 한국 언론에 밝혔다.
이는 한국 의료 역사상 처음으로 100년 전 흉부외과 기록이기도 하다.김원곤에 의하면 발견된 기록물은 당시 병원의 단순한 의료기록이라기보다는 이완용 피습사건 후 일제에 의해 재판이 이뤄지면서 검사 측 요구로 의료진이 제출한 감정서 성격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캐나다로 이민간 장손주 이윤형을 대표로 1992년부터 조상땅찾기 소송을 시작했다.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경기도 고양시 임야 2만 5천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고, 다시 1998년 7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토지 2372㎡(약 712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내 승소했다. 반환받은 토지는 즉시 제3자에게 매각, 약 30억의 매매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완용과 송병준등 친일파의 후손들은 친일 환수 재산 반환 소송을 여러 개 준비중이다.
|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운현궁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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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李鎬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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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익 (趙秉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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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씨(李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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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용 (李允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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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李完用) 이호준 아들로 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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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趙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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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희 (趙民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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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구 (李明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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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李升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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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걸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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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구 (李恒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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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구 (金鎭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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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수 (趙重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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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태 (李丙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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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길 (李丙吉) 이승구 아들로 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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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희 (李丙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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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李丙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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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李丙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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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오 (李丙吾) | |||||||||||||||||||||||||||||||||||||||||
양 조부 : 이식(李埴)
아버지: 이석준(李奭俊, 다른 이름은 이호석(李鎬奭), 선공감 감역관(正九品) 역임)
서모 : 이름 미상, 아버지 이석준의 첩
양 아버지: 이호준(李鎬俊, 1821년 - 1901년 4월 14일)
아내: 양주 조씨(陽州趙氏, ? - ?)- 조병익(趙秉翼)의 딸.
맏며느리: 임건구(任乾九, ? - ?)
손자: 이병길(李丙吉[67], 1905년 - 1950년, 생부는 이항구)
둘째 아들: 이항구(李恒九, 1881년 8월 21일 - 1945년 3월 6일)
둘째 며느리: 김씨(金氏, ? - 1933년)
손자: 이병길(李丙吉, 출계)
증손 : 이윤형
손자: 이병희(李丙喜, 출계)
증손 : 이석형
손자: 이병철(李丙喆)
손녀: 이병오(李丙吾)
양 서모 : 이름 미상, 평양 출신 기생으로 양아버지 이호준의 첩
의붓 형수: 전주 이씨(全州李氏, 흥선대원군의 서녀, 고종의 이복 누이, ? - 1869년)
조카: 이명구(李明九, 대한제국에서 시종원 시종 역임)
종손: 이병태(李丙台)
의붓 형수: 김씨, 이윤용의 재취 부인
장인 : 조병익(趙秉翼, 본관은 양주)
장모 : 송씨(宋氏)
사돈: 임대준(任大準), 맏며느리 임건구의 친정아버지
사부인 : 윤씨(尹氏, 맏며느리 임건구의 친정어머니)
사돈: 임선준(任善準), 임건구의 숙부
사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http://XXX/minwoo09191/120146090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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