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깔유머방
《조선왕비열전》#8 - 1
ㅡ 제8대ㅡ 예종(이황)의 여자들 ㅡ
장순왕후 한씨!
안순왕후 한씨!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은 후궁이 없었다.후궁을 안 좋아해서가 아니라 후궁을 둘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 세조도 엄마인 정희왕후을 매우 사랑했고, 후궁 하나 있는 근빈 박씨도 신하들의 지극한 충성심(?)에서 할 수 없이 예비대로 맞았을 뿐이다.^^
세조가 여자들 문제로 골치를 썩이지 않은 것을 보고 배워서, 예종이 후궁을 안 들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왜냐면 아들은 아빠를 많이 닮기 때문이다.아마도 아들 때문에 속을 많이 썩는 엄마들이 이 글을 보면서,
"맞다. 맞어!"
하면서 맞장구를 칠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그래, 씨는 못속여...할런지도..." ^^
암튼,
예종은 여자를 멀리 했다.
이유는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만에 갑자기 고질병인 족병으로 급사를 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최단명 왕이 되었다.
그러니 왕비가 무슨 힘을 쓰겠는가?
남편이 비록 맘에 들지 않더라도 고위직에 있으면 부인들이 호가호위 할 수도 있다. 조선의 사헌부 격인 검찰청의 모 사모님은 그 비싼 호피무늬 오버코트도 받으셨다.
장순왕후 한씨!
저 유명한 한명회의 세째 따님이시다.
권력의 단맛을 본 한명회가 세조의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에게 나이 열 여섯에 시집을 보낸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죽으니 당연히 둘째 해양대군이 왕이 되었다.
예종으로...
장순왕후 한씨는 남편 해양대군이 왕이 되기 전에 아들 인성대군(3살 때 졸)을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1개월 만에 하늘로 갔다.
꽃다운 나이 열아홉에...
그래서 남편이 왕이 되고 나서 왕후로 추존된 것이다. 비록 왕비는 못했지만 이름만이라도...
왜 조선왕조 왕비들이 산후 후유증으로 많이 돌아가셨을까?
답은 명확하다.
.
.
.
일을 안 해서...^^
생각을 해보라.
왕비라면,
밥을 해..
빨래를 해..
청소를 해..
시장을 가나..
밭을 매나..
(이 대목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옛날에는 산달이 다 돼도 밭에서 일하다 애를 많이 낳았다. 그냥 쑤~욱하고...^^)
담박질을 하나..
.
.
.
봄에 산에 들에 나물을 깨러 가나..
그냥 매일 가만히 놀고 먹었다.
그러니 운동도 부족할 것이고, 먹어도 소화도 잘 되지 않았을 것이다.
허약체질이 될 수밖에...
저 장수왕, 영조를 보라.
엄마 최무수리!
원래 빨래 담당 무수리였다.
그러니 얼마나 튼실했겠는가?
그래서 영조 같은 애를 낳은 것이다.
지금의 여자들의 삶도 왕비와 비슷하다.
밥은 전기밥솥이..
빨래는 세탁기가..
청소는 청소기가..
설걷이는 세척기가..
아궁이 불은 보일러가..
돈은 남편이...
(이건 일부 능력있는 여성에게만 해당됨^^요새 맞벌이가 많으니...ㅋ)
세상이 왕비 천지다.
그런데
.
.
.
왕들은 다 어디 가고
지금 천지에 머슴들만 있을까?^^♡
결론은
여자들은 열심히 일을, 아니 운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건강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ㅎ
장순왕후 한씨!
한명회 이야기를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된다. 장순왕후에 대해 할 말이 없으니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본다.
한명회!
우선 간신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줄타기를 매우 잘한 광대가 연상되고, 마지막에는 죽어서 부관참시 당하는 것이 생각날 것이다.
희대의 처세의 달인이시다.
한명회(韓明澮, 1415년 11월 26일 칠삭둥이로 태어나서 1487년 11월 28일 73세로 장수했다.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본관은 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조상 빽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세 번씩이나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 잔칫날 치는 장막(텐트) 때문에...
달도 차면 기울고, 권세도 시간이 가면 약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세상 이치다.^^
오가작통법과 면리제(面里制)를 창시한 인물이며, 그가 만든 행정제도인 면리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한말의 불교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동생 한명진의 후손이다.
한명회는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두 딸을 삼촌과 조카한테 보내, 조선왕조 유일한 두 왕의 장인어른이 되었다.
참 대단한 분이시다.
그는 모사에 능했으나 그것을 자신의 영달에만 사용하여 이후 조선의 정치에서 벼슬을 사사로이 사고파는 일을 처음으로 행한 자로서 결국은 조선 전체의 국가 시스템을 망친 인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더불어 성종 때 이후 사림의 정계진출 이후 도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그가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주도한 점이 집중 부각되어 비판과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처세의 달인이었다.
똑똑한 naver를 참고했다.
조선왕조에서 정도전과 한명회를 모르면 간첩이다.
역사의...^^♡
왕비열전에 두 왕비를 배출한 한명회의 공로를 인정하여 길게 썼으니 이해를 바란다.
그렇게 살아도 한명회는 갔다.
아무것도 못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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