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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 시점에서 바라본 이순신

와키자카의 독백

<p style='color: rgb(85, 85, 85); line-height: 26px; padding-top: 0px !important; padding-bottom: 0px !important; font-family: "Noto Sans KR", Arial, "Apple SD Gothic Neo", "Malgun Gothic", "맑은 고딕", "Nanum Gothic", Dotum, 돋움, Helvetica, sans-serif; margin-bottom: 28px; box-sizing: inherit;'>도요토미 관백 전하의 명을 받아 조선으로 출정하던 임진년, 난 혈기 하나로 뭉쳐진 30대의 핏덩이였다. 핏덩이는 조선인의 피를 묻혀가며 덩치가 커져갔고 이내 결코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나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교토의 한적한 마을에 은둔해 불교에 귀의한 이 몸이 죽음을 앞두고 새삼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와키자카 가문의 후손들이 세상엔 아무리 발버둥쳐도 넘어설 수 없는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아 차라리 현명한 절망을 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난 전쟁이 개시되자마자 경상도 해안이 삽시간에 점령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적잖이 실망했다. 조선 수군은 허수아비로 판가름 났다. 비록 치열하진 않더라도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보고 싶던 난 내심 경멸의 감정에 휩싸였다. 4월 중순 조선반도에 상륙해 5월 초 한양성에 도착할 때까지 조선군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의주로 피신한 왕을 구출하기 위해 조선 남부 전역에서 근왕병이 조직되고 있다는 전령의 말을 접했을 때는 6월로 당시 난 한양성에 주둔해 있었다. 

근왕병 숫자가 애초 3만에서 점점 불어나 10만에 육박한다는 첩보가 있자 우리는 척후병을 파견해 적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용인에 집결해 있던 조선근왕병이 대오조차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임이 확인됐고, 이들을 청소하는 귀찮은 임무가 마침내 내게 떨어졌다. 나 와키자카는 나른한 여름날 소풍 가듯 휘하 정예병 1000명을 인솔해 느긋하게 적진 주변에 이르렀다. 일당백인 우리가 뭘 더 기다렸겠는가? 산 위에서 농성하고 있던 아군 600명에게 협공 명령을 내린 난 망설임 없이 근왕병 본진으로 진격해 지휘부 장교부터 차례로 베어나갔다. 혼비백산한 저들은 무기를 버린 채 뿔뿔이 흩어졌고 인근 풍덕리를 흐르던 정평천(亭坪川)은 조선군 피로 붉게 물들었다.
</p><p style='color: rgb(85, 85, 85); line-height: 26px; font-family: "noto sans kr", arial, "apple sd gothic neo", "malgun gothic", "맑은 고딕", "nanum gothic", dotum, 돋움, helvetica, sans-serif; margin-bottom: 28px; box-sizing: inherit;'>
참혹한 완패 </p><p style='color: rgb(85, 85, 85); line-height: 26px; font-family: "noto sans kr", arial, "apple sd gothic neo", "malgun gothic", "맑은 고딕", "nanum gothic", dotum, 돋움, helvetica, sans-serif; margin-bottom: 28px; box-sizing: inherit;'>
</p><p style='color: rgb(85, 85, 85); line-height: 26px; font-family: "noto sans kr", arial, "apple sd gothic neo", "malgun gothic", "맑은 고딕", "nanum gothic", dotum, 돋움, helvetica, sans-serif; margin-bottom: 28px; box-sizing: inherit;'>b9176057-7c0c-48f0-a177-a08b9c118b5e.jpg</p>

청전 이상범 화백의 충무공 영정을 소개한 1932년 5월 29일 동아일보 기사. 

지금 생각하면 용인에서 거둔 대승이 내겐 독이었다. 이순신이라는 전라좌수영 수사(水師)가 남해안 보급로를 교란하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또 그를 제거할 임무가 수군인 내게 지워졌을 때 나 와키자카는 한 치 앞을 모른 채 기뻐 날뛰었다. 제법 오래 버텨줄 적장을 만났으니 그보다 즐거운 일이 없었다. 

7월 초 운명의 그날, 조선군 판옥선 다섯 척이 우리 선단 쪽을 향해 다가오다 갑자기 후퇴하기 시작했다. 거제도 북단에서 출정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난 교만한 데다 승리에 조급해 있었다. 경쟁자인 구키(九鬼)에게 뒤질세라 선단에 출격 명령을 내리고 전속력으로 적선을 추적했다. 유인작전이란 걸 모르지 않았지만 그런들 뭐가 대수였겠는가? 어차피 갈고리로 적선을 끌어당긴 뒤 갑판에서 근접전을 벌이면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아군을 유인하려는 판옥선들은 오히려 저들의 본진으로 우리를 인도해줄 고마운 길잡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어디선가 첫 북소리가 울리고 좌우의 섬 사이로 적선이 출현했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조선군 전함들은 부채꼴로 학익진을 펼친 채 미동 없이 제자리를 지킬 뿐 우리 쪽으로 접근해오지 않았다. 피아의 전함끼리 뒤섞인 접전을 예상했던 나 와키자카는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후미로 따라붙고 있던 구키의 선단에 퇴각 신호를 보냈다. 어리석은 구키는 신호를 나의 장난쯤으로 여겨 무조건 직선으로 밀고 들어왔고 한산도를 마주 본 상태로 급히 정지해 있던 나의 선단과 충돌했다. 아군 선단은 미처 조선군과 붙어보기도 전에 서로 뒤엉켜 전열이 무너졌다. 

한산도 앞바다는 차갑고 거칠었다. 물에 뛰어들기 직전 갑옷을 벗은 덕에 몸이 간신히 수면으로 떠올랐고 나 와키자카는 살아남고자 전력을 다해 가까운 섬으로 헤엄쳤다. 적선들의 함포 사격으로 산산조각난 아군 전선들은 서로 부딪치며 회전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일부 아군 전선이 반격하기 위해 학익진을 뚫었으나 대기하고 있던 적의 귀갑선(龜甲船)에 으깨져버렸다. 참혹한 완패였다.

이순신을 찾아라섬에 올라 몸을 누이고서야 멀리 적장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이순신. 그는 아군을 전멸시키고 난 뒤 자신의 선단을 재정렬하는 의식을 치렀다. 삼엄하고도 침착한 검열이 끝나자 그가 만족한 듯 장군기를 흔들었다. 바람소리만 가득하던 바다에 짧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는 주변 섬에 피신해 있던 우리 수군들을 잠시 응시했다. 마음만 먹으면 모조리 주륙할 수 있었지만 이순신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주도면밀한 방어진을 유지하며 당포 방향으로 조용히 물러갔다. 

언제인지 모를 구조를 기다리며 부하들과 해초로 연명하던 난 밤마다 달을 보고 통곡했다. 보름 뒤 구키 선단에 구조된 내겐 ‘미역장군’이라는 치욕적인 별명이 붙었고, 한산도의 차가운 달빛은 저주가 되어 나 와키자카의 전 생애를 지배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도 그 순간의 분함만은 진정시키기 어렵다. 

이순신. 그 이름은 나를 더 오래 살도록 부추기는 부적이었다. 나는 이순신이 죽었음에도 그 이름을 붙잡고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 사나이 와키자카를 증명하려던 그간의 헛된 노력이야말로 혹시 진정한 패배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나는 습관처럼 서재 은밀한 상자 속에서 초상화 한 점을 꺼내놓고 마치 비밀스러운 제사를 지내는 자처럼 예를 갖춘다. 임진년 전쟁 7년 동안 그토록 암살해보려 노력했던 자, 하지만 와키자카라는 졸장부에게 살해당하기엔 너무나 아까웠던 자. 그림 속 이순신은 때론 슬퍼 보이기도, 또 때론 지쳐 보이기도 한다. 전쟁의 신은 본디 외로운 법. 

임진년 전쟁 첫해 내가 한산도에서 맞이한 패배는 아군 보급로 단절을 초래해 육지 본진의 발목을 잡았고, 이순신이 살아 있는 한 결코 조선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해졌다. 해전 선봉에 더는 설 수 없게 된 나는 그를 암살하는 업무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처음엔 조선어에 능통한 승려들을 적진에 투입해 독살하는 걸 시도해봤지만 아예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의 정확한 얼굴을 파악해뒀다 교전 중에 집중 공격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첩자들이 가져오는 초상들이 이상하게 제각각이었다. 나는 전쟁이 마무리될 무렵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암살 시도를 예견한 이순신은 부하들을 그린 그림들을 자신의 초상이라 속여 우리 첩자들에게 전달했고 각 그림은 또 다른 이본을 낳아 종국엔 어떤 그림이 진짜 이순신 초상인지 모를 지경에 빠진 것이다.

 

 


질투와 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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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대척점에 있던 일본 무장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고문헌에서 맹장(猛將)으로 그려진다.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바다 건너 후지산을 바라봤다는 전설을 그린 목판화. [열린책들 제공]

더 놀라운 건 이순신의 군진엔 실제 다른 한 명의 이순신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순신의 부장인 그 이순신(李純信)은 명나라 소속 종군 화사가 그린 초상화에 자기 얼굴을 남겼다. 이 가짜도 이순신은 이순신인지라 그의 초상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난 발을 구르며 기뻐했었다. 동맹군 화사 앞에 가짜를 내세울 순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림을 보면 볼수록 그건 이순신이 아니었다. 

필살의 의지로 이순신을 추적하던 나는 그의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출생과 성장, 혼인과 등과 과정을 모두 세밀히 파악하고 있었고, 그의 식성과 걸음걸이의 특징, 심지어 필적까지 수집하고 있었다. 그림 속 이순신은 결코 내가 아는 그 일 리 없었다. 내가 아는 이순신은 훨씬 불투명한 심연을 지닌 복잡한 사내여야 했다. 그 무렵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전신(戰神) 이순신의 모습은 증오와 선망, 질투와 숭배의 감정으로 뒤섞여 현실감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정쟁에 휘말려 파직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됐을 때 비로소 그의 진짜 초상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건 그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던 승병 하나가 자기 주군의 운명이 다할 것으로 여겨 비장하게 그린 최후의 초상이었다. 조선 사찰에서 수행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아군 첩자로 활동하던 일본 승려를 통해 그 그림을 건네받는 순간, 나는 그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 이순신 초상임을 곧바로 알아챘다. 한참을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떤 점은 상상과 달랐고 어떤 점은 너무나 예상에 부합해 놀랍기만 했다. 

나는 초상의 임모본(臨摹本) 여러 개를 그리도록 해 조선군 수영(水營) 근처에 잠입해 있던 자객들에게 전하게 했다. 수졸로 강등된 이순신은 호위 없이 활동하고 있었고 내 밀지 한 통이면 그의 목숨은 끝장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이미 병졸로 전락해버린 호걸을 확인 사살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얼마 뒤 벌어진 명량에서의 끔찍한 패전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한 치의 머뭇댐 없이 그를 암살했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든다. 과연 내게 그의 생명을 앗을 자격이 있었을까? 하늘이 낸 장수를 인간 와키자카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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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p style='color: rgb(85, 85, 85); line-height: 26px; font-family: "noto sans kr", arial, "apple sd gothic neo", "malgun gothic", "맑은 고딕", "nanum gothic", dotum, 돋움, helvetica, sans-serif; margin-bottom: 28px; box-sizing: inhe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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