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깔유머방

33살 유부남입니다
어릴 때 잠깐 알았던 여자애가 있었어요
며칠전 그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장례식 다녀온 뒤로도 계속 속이 쓰리네요
고인의 이야기를 게시한다는게 몹쓸 일일까 싶다가도
주변에 기댈 곳 하나 없던 그 친구를 익명의 누군가라도 추모해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조금 풀고자 작성합니다
말이 길어질 것 같고 요약도 없습니다
저는 어릴적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점에 IMF를 직격으로 맞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랑 3살터울 남동생은 고향인 부산 할머니집에
아버지는 서울에 어머니는 지인의 가게에 일하러 제주도에
그렇게 초등학교 들어가는 순간부터 어머니 아버지 없이 할머니와 동생 셋이서 살았습니다
그래도 막 불행하고 힘들지는 않았어요
워낙 기운 좋은 할머니가 밥도 잘 챙겨주셨고 할머니 집이 있던 동네애들과도 잘 지냈고 학교도 재밌었거든요
할머니가 사시던 곳은 부산 사시는 분들은 다들 아실만한 ㅇㅇ동 주공아파트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을 잘 다녔는데 2년 가까이 부모님 얼굴을 한번도 못봤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저희 부모님을 새끼 내다버린 년놈들이라며 욕했고 너거가 고생이 많다며 자주 우셨습니다
그런 모습에 점점 집에 있는게 싫어지더라구요 가뜩이나 에너지 넘치는 초딩일 때라 밖으로 쏘다녔어요
2학년 겨울방학이 끝날 쯤 동네 놀이터에서 노는데 가장 친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를 소개시켜 주더라구요
그 친구는 그 동네에 골목대장 같은 아이였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그 골목대장 친구와 붙어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친구는 고학년 형들 뿐 아니라
중학생 형들과도 알고있는 아이였습니다
시대도 시대고 동네도 동네이니만큼 방치된 아이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저녁이 지나고 밤이 늦어도 집에 안들어가고 골목이나 놀이터, 공터에서 서성이는 애들이 천지였습니다
저 또한 할머니가 잠드시는 초저녁이 지나면 8시~9시쯤 밖으로 나가서 애들과 어울려 놀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애들 5~6명이 모여서 하는거래봐야 옥상탈출, 경찰과 도둑, 술래잡기, 나무작대기 칼싸움 뭐 그런거였죠
여느날처럼 그렇게 노는데 골목대장 녀석이 대뜸 재밌는거 하러갈래? 하더라구요
자기가 고학년 형들 따라다니면서 재밌는거 알아왔다고 알려준다고 가자고 하는데 누가 거절하겠어요 다 따라갔습니다
그 주공아파트 단지는 1단지 2단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2단지에 2~3층정도 좌우로 긴 형태의 낡은 상가가 있었습니다
상가 지하에는 꽤나 큰 마트가 입점해 있어서 낮에는 무서운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2층 3층은 거의 반 이상 폐점포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골목대장 녀석이 그 상가로 저희를 데리고 가는데
2층 계단을 올라가니까 술냄새 담배냄새가 풍기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가서 보니까 동네에 한량같은 아저씨들이 모여서 노름을 하던 장소였습니다 천막같은걸로 입구를 대충 막아놨었어요
무서운 아저씨들이 많아서 애들이 다가가길 꺼리는데
그녀석이 그 노름장 옆 코너로 돌아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하더라구요
가보니까 엄청 마르고 꾀죄죄한.. 때 묻은 야상을 입은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당시가 봄~여름이었는데 그런 차림이었어요
골목대장 녀석은 "여기있네." 라고 말하며 그 여자아이를 끌고 상가 건물 뒤편 분리수거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부터 애를 패기 시작하는거에요
발길질, 돌팔매질, 주먹질 등등 그냥 되는대로 막 때리는데 멍하니 보다가 말렸습니다
저기 노름장에 얘 아부지 있는거 아니냐고 그러지말라고 그랬어요
그러니 그녀석 하는말이 얘 맨날 저기있고 쟤 찾지도 않는다고, 형들이 심심하면 와서 때리고 괴롭히는데 암말도 안한다고...
적당히 겁많고 적당히 비겁한 저는 더이상 말리지도 가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서서히 밤에 놀러나가는 걸 줄이고 놀다가도 상가로 향하는 분위기면 빠지곤 했습니다
동네에 무섭다고 유명한 저희 할머니 핑계를 대면서 집에 박혀있었어요
한번 그렇게 인상이 박히니까 그 여자아이가 계속 보이더라구요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고 바로 옆반이었습니다
학교에서도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었고 점심시간에 급식 먹은 뒤 다들 나가서 노는데
늘 혼자 창가에 서서 화분을 보고 있었어요
며칠 오고가며 힐끔거리다 혼자 있을때 몰래 다가가서 말을 걸었어요
오늘도 밤에 걔네가 상가 가서 너 괴롭힐거라고. 오늘은 형들도 같이 가니까 미리 도망가있으라고..
그 아이는 듣는둥 마는둥 하길래 제가 답답해서 왜 거기 있냐고 미리 도망가있으면 안되냐고 짜증을 냈습니다
그러니 대답을 하더라구요
자기 아버지가 노름하는데 옆에서 술담배 심부름 시키려고 데려다 놓는다고.. 그래서 찾을 때 없으면
맞아죽는다고 애들한테 괴롭힘 당해도 거기 있는게 낫다고 하는겁니다
그래서 그럼 아버지 옆에 붙어있으면 안되나? 하고 물으니
가시나가 노름판에 기웃거리면 재수 없다고 밖에서 기다리게 한대요.. 참...
속이 답답했던 저는 무슨 정의감이 분건지 얘를 구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희반 담임선생님은 너무 젊은 여자분이셔서 믿음이 안갔어요
어떡하지 고민하다가 그냥 노빠꾸로 제가 상가로 찾아갔습니다
저녁쯤 찾아가서 노름판에 들어가서 ㅇㅇ이 아빠있어요? 하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웬 퀭한 아저씨가 자기인데 너 뭐냐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저씨 딸래미 ㅇㅇ이가 맨날 동네 애들한테 맞는다고 저기 냅두면 안된다고요
돌아오는 말은 "니가 뭔데 내 딸래미가지고 이래라 저래라하노" 하며 손찌검을 할려고 하더라구요
그대로 도망치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결국 기쎄고 무서운 저희 할머니한테 사정을 말씀드렸어요
"할매 내가 ~~해서 좀 불쌍한 애를 알게됐는데 도와주고싶다." 이런식으로요
제 얘기를 다 듣더니 할머니는 저보고 앞장서라며 그 상가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주말이었는데 대낮부터 노름판에 술판에 엉망이더라구요 그 여자아이도 여전히 상가 구석 계단에 쭈구려있었구요
할머니가 노름장으로 들어가서 몇번 소리를 쳤습니다
아재가 애아빠라도 애 밥 맥일 사람은 있어야하는거 아니냐고 딸아이를 저래 냅두면 되냐고 막 호통 치셨는데
어떻게 얘기가 잘 된건지 그 이후로 학교 마치면 그 여자아이는 저희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갔습니다
저랑 동생이 밥먹고 tv로 만화를 보고있으면 옆에 앉아서 멍하니 같이 보다가 시간되면 제가 집에 데려다줬어요
돌아가는길에 동네 애들 마주칠까봐 조심조심 하면서 데려다 줬던 기억이 있네요
tv 보고싶은거 보라고 리모콘 줘도 너네 보는게 재밌다며 가만히 있고
밥도 주는대로 다먹고 좋아하는거 싫어하는거 그런게 없는 아이였습니다
솔직히 많이 친해지진 않았어요
저도 비겁한놈이라 그런 와중에도 그 애한테 학교에서는 아는척하지말라고 그랬거든요
몇달 그런 생활이 지속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 집에가니까 엄마가 와있더라구요
집 형편이 좀 괜찮아져서 저희 형제를 데리러 온거였습니다
동네가 위험하고 그래서 엄마가 사는 동네로 전학부터 가자고 그러는데
당시 저는 그 동네를 벗어난다는 생각에 마냥 기쁘기만 했던거같아요
방학이 시작되는 그날 바로 엄마손을 잡고 그 동네를 떠났고 그이후로 단 한번도 그동네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할머니도 강원도 사시는 고모집으로 가시게 됐고 이후 그 아이 소식은 모르고 지냈습니다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아예 잊고 살았어요
저는 무탈하게 컸고 남들처럼 군대가고 대학가고 취업하고 정신차리니까 유부남이 되었습니다
4년 전 신혼때 저희 회사에서 경리 업무를 보던분께서 급하게 퇴사를 하셨고 그자리가 비어서 급하게 파견근로직을 뽑았습니다
인수인계 담당이 저였는데 이름이 너무 익숙한거에요
흔한이름도 아니고 50~60대 여자이름같은 우리 세대치곤 많이 특이한 이름이라서 이름 보자마자 혹시? 했습니다
실물로 보니까 바로 알아보겠더라구요
이력서 보는데 순탄하게 살아온 인생은 아닌거 같았습니다 참 힘들게 살아온 티가 나더라구요
아는척은 안했습니다
아픈 과거를 아는 사람이 있다는게 상처를 들쑤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한달을 사무적 대화만 하며 일했는데
사내 체육대회 준비한다고 같이 뭘 사러 간적이 있습니다
말없이 걷는데 문득 말을 걸더라구요 혹시 예전에 ㅇㅇ주공아파트 살던 누구 아니냐고
맞다고 하니까 긴가민가 했는데 얼굴이 많이 안변해서 알아봤다고 먼저 아는체를 해주더라구요
그때 고마웠다고 너 이사가고도 1년넘게 너희 할머니가 보살펴줬다고 할머니는 잘 계시냐 하며
살갑게 구는데 참 고마웠습니다
사실 와이프한테 그 친구 얘기를 하며 아는체를 할지말지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현명한 제 와이프는 먼저 아는체 하지않는다면 가만히 있으라했습니다
고맙다고 말하는 그친구에게 저는 되려 미안하더라구요
인사도 없이 이사간거, 영웅심리로 도와주는 척하며 학교에서는 쌩깐거 등등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친구는 괜찮다고 자기 인생에서 제일 따뜻했던 기억중 하나라고 연신 웃더라구요
이후 둘이 간단히 저녁도 한번 먹고 회사에서도 잘 챙겨주며 나름대로 잘 지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다른 직원들과 교류함에 어려움이 많았고 일적으로 실수도 많았어요
결국 1년 계약이 끝나고 재계약은 하지 못했습니다
오지랖 부려서 일자리 주선이라거나 뭐 지인 소개라거나 도와주고 싶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막 도와준답시고 나서기가 껄끄럽더라구요...
그 친구가 퇴사 후에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는데
1년쯤 지났을때 카톡이 왔습니다
저희 할머니 사는곳을 묻더라구요 찾아가서 인사한번 드리고싶다고
그래서 알려줬고 할머니 뵙고 왔다고 고맙다고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이후로 간간이 할머니 핑계 대며 소식 묻고 연락했는데 어느 순간 답장이 없더라구요
많이 바쁜가보다 하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그냥 이제 내가 불편하구나 하고 저도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전에 죽었다는 문자가 오더라구요 .. 혼자 살다가 스스로 갔다고 합니다
핸드폰에 있는 연락처에 다 문자가 발송된거 같은데 장례식장에는 사촌언니라는분 한분만 계시더라구요
상복 입은 사람도 없고 1일장으로 간소하게 끝냈습니다
화장하는 순간까지는 자리를 지켰습니다
저랑 와이프 그친구 셋이서 밥도 먹은적도 몇번 있는데
장례식장에서 와이프가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제 몫까지 울어준거같아요
좀 더 살갑게 굴걸
한번 더 들여다 볼걸 하고 후회가 드네요
그친구는 저에게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제가 그 친구에게 더 고마운게 많습니다
살면서 못된짓 안하고 피해안주고 착하게 살아가자고 다짐은 하면서도 쉽지않았고 아닌적도 많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참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저희 가족 덕분에 자기도 사람을 조금이라도 믿을수 있었다고
그렇게 말해주던게 아직도 귀에 맴돕니다
떵떵거리진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길 바랬는데 평생을 쓸쓸하게 보내다 간거같아서 ...
외롭고 힘든 시기인거같아요... 나 하나, 내가족만 바라보기도 빠듯하죠 다들
그래도 소중한 사람들 한번씩 더 들여다 보려구요
이 글 읽으신분들 모두 다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친구도 행복한 곳으로 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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