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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게시판

*** 한반도 영세중립국 가능성 ***코멘트6


러시아(니콜라스 2세, 로마노프왕조 14번째군주, 러시아 마지막 황제)는 동쪽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 러시아는 1890년대에는 지방의 나라들을 흡수하면서 중앙 아시아를 가로질러 아프가니스탄에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서쪽으로는 폴란드에서 동쪽으로는 캄차카 반도에까지 뻗어 있었다.  


1897년 12월, 러시아 함대가 처음 여순항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3개월 후,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고, 이에 따라 러시아는 여순항과 대련만을 조차하여 주변의 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부동항을 얻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였고, 1년 후에는 이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하얼빈에서 심양을 경유하여 여순항에 이르는 철도(동청철도)를 놓기 시작하였다. 대련과 여순역이 화재로 소실되자, 러시아는 의화단으로부터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만주를 점령였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놓으면서 이 지역에서의 영향과 존재를 굳건하게 하려 하였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천러파, 온건파)는 러시아와의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군을 몰아내기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였고,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권한을 인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독점권 한반도의 북위 39도 이북에 대한 중립지역 설정, 한반도의 군사적 이용 불가를 주장하였다. 


그 동안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과 영일 동맹(1902년)을 맺었는데, 이는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 나라가 있으면, 영국이 일본의 편으로 참전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러시아는 독일이나 프랑스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영국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다. 만주의 남서부의 요동반도에 위치한 여순항은 러시아에 의해 주요 해군기지로 요새화되었다. 러시아가 아시아 본토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바다를 손에 넣는 것이 필요했으므로, 일본의 첫 군사 목표는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대를 없애는 것이었다


1904년 2월 4일, 수십 척의 태평양 함대가 여순항을 떠났다는 정보가 일본에 입수되었다.

2월6일 아침, 도고 헤이하치로(東 平八) 제독은 사세보에서 제물포의 육군 상륙과 여순항의 공격을 목표로 함대를 발진시켰다.

2월8일 저녁, 도고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함대가 여순항의 러시아 군함에 대한 기습적인 어뢰 공격으로 전쟁을 개시하였다.

일본은 2월 10일에 선전포고하였고, 짜르인 니콜라스 2세는 일본의 공격 소식에 아연실색하였다. 그는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걸어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장관들도 일본이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투가 있은 지 8일 후 전쟁을 선포하였다.


1.여순항 전투

일본은 러시아의 여순항 사용을 막으려 했다. 2월 13일 ~ 14일, 일본군은 시멘트를 채운 증기선 일곱 척을 해협 깊숙이 침몰시켜 여순항을 봉쇄하려 하였으나, 배가 너무 깊이 가라앉아 성공하지 못했다.

3월, 부제독 마카로프(Makarov)는 제1 러시아 태평양 소함대를 맡아 여순항의 봉쇄를 돌파하려 했다.

1904년 4월 12일, 두 대의 러시아 노급전함, 기함 페트로파블로스크(Petropavlovsk)와 포베다(Pobeda)호가 여순항 밖으로 빠져나갔으나, 일본군의 기뢰가 폭발하여 페트로파블로브스크는 곧바로 침몰하고, 포베다는 수리를 위해 항구로 견인되어야 했다. 가장 유능한 러시아의 전략가였던 마카로프 제독은 페트로파블로브스크에서 사망하였다.

Russia Petropavlovsk (Battleship) (1898)

 

러시아 기함 페트로파블로브스크(Petropavlovsk)

러시아 군대는 일본의 방어적인 기뢰 설치 전술을 받아들였다. 1904년 5월 14일, 두 척의 일본 전함, 야시마와 후츠다가 여순항 바깥쪽에 러시아군이 설치한 기뢰에 피해를 입었다. 각각은 적어도 두 발씩의 기뢰와 부딪혔다. 야시마는 450명의 승조원과 함께 수 분 안에 가라앉았고, 후츠다는 수 시간 뒤에 견인되었다.

6월 23일, 러시아 제독 빌헬름 비트게프트(Wilgelm Vitgft)의 지휘하에 소함대가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실패하였다. 6월 말, 일본의 포병이 항구를 포격하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여순항을 봉쇄하였다.

1904년 8월 10일, 러시아 함대는 다시 포위를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공해에 닿기 전에 도고 제독의 전함으로 구성된 소함대와 마주친다. 러시아에는 '8월 10일의 전투', 흔히 황해해전(Battle of the Yellow Sea)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양측은 포격을 주고 받는다.

도고 제독은 또 다른 러시아의 전함이 태평양으로 파견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전투는 결정적인 전투의 요소를 갖고 있다. 일본은 두 척의 전함을 러시아 기뢰로 잃어, 한 척만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전함들은 함포를 계속 주고 받았으며, 러시아의 기함인 체사레비치(Tsesarevich) 전함이 함교에 직격탄을 맞아 함대 사령관인 비트게프트(Vitgeft) 제독이 사망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 함대는 다시 여순항으로 향하게 되어, 양측 모두 침몰한 전함이 없었지만 러시아는 다시 여순항에 머무르게 되었고, 일본 해군은 러시아 함대에 대항할 전함이 여전히 건재했다.

Model of Battleship Tsesarevich

체사레비치(Tsesarevich) 전함

끝내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의 전함들은 포위한 육군의 포격으로 침몰되었다. 육지로 포위된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도 또한 실패하였다. 8월말의 요양(遼陽) 전투 후 러시아군은 선양(瀋陽; 심양)으로 후퇴하였다. 여순항은 결국 주둔군 지휘관이 상부와의 의논 없이 일본에 항구를 양도함으로 1905년 1월 2일 함락되었다.


2. 쓰시마 해전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러시아는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Zinovy Rozhestvensky) 제독의 지휘하에 희망봉을 경유하여 아시아로 향하는 발트함대를 보내어 러시아 함대를 지원하려 하였다.

1904년 8월, 일본 정부는 동해에서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해 울릉도와 독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 회의에서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시마네현의 관할로 지정하였으며 2월 22일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내용의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발표하였다. 울릉도에는 1904년 9월, 독도에는 1905년 8월에 망루가 세워졌다

러시아의 '제2태평양함대'(발트함대)는 여순항을 구하기 위해 29,000km 를 여행하였으나, 뤼순항이 함락 되었다는 소식은 마다가스카르에 있었던 함대의 사기를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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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Rozhestvensky) 제독의 유일한 희망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경로는 3가지가 있었는데, 한국과 일본 사이의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는 길은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었으나, 일본에 매우 가까워 가장 위험한 길이었다.

도고 제독은 러시아군의 진행을 알아차렸고, 여순항이 함락되어 제2·제3태평양함대는 극동의 유일한 러시아의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할 것을 알았다. 전투 계획이 세워졌고, 군함들은 러시아 함대를 잡기 위해 수리되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처음에는 6척의 전함으로 구성되었으나 당시에는 4척이 남아 있었으며, 순양함, 구축함, 어뢰정은 그대로였다. 제2태평양함대는 4척의 보로디노급 신형 전함을 포함하여 8척의 전함, 순양함, 구축함, 기타 함선까지 총 38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5월 말, 제2태평양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한 여행의 막바지에 있었다. 불행하게도, 러시아군의 병원선(hospital ship)이 불빛을 노출하여 일본의 무장한 무역순양함 시나노 마루호에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무선으로 토고의 사령부에 알려졌고, 연합함대는 곧 출격을 명령받았다.

여전히 정찰로부터의 정보를 받으면서 일본군은 러시아 함대의 위치를 알 수 있었고, 러시아 함대의 'T'를 가로지를 수 있었다.

일본 전함 미카사.  (쓰시마전의 함대 사령관; 토고 헤이하치로(東 平八)의 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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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5월 27일 ~ 5월 28일에 러시아 군대와 교전하였다. 러시아 함대는 사실상 전멸되었고, 8척의 전함과 많은 수의 작은 함정들, 5,000명 이상의 인원을 잃었고, 일본군은 3척의 어뢰정과 116명의 인원을 잃었다. 러시아군은 단 3척의 함정만 블라디보스토크로 빠져나갔다. 쓰시마 해전 후, 일본군은 사할린 전체를 점령하였고, 러시아는 평화 회담을 청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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