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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게시판

전 해태타이거즈 최해식선수 인생역전 이야기

[박동희의 Mr.베이스볼] ‘풀빵’ 해태 최해식의 인생역전

전 해태 포수 최해식

1996년. 그해 최초의 복제 포유류 돌리가 태어났고, 강원도 강릉엔 무장공비가 침투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던 해였다. 그해 해태(KIA의 전신) 김응룡 감독의 시즌 전 심정은 절망에 가까웠다. 한국시리즈 7회 우승에 빛나는 노장 감독은 ‘해태의 운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도 했다.

‘국보급 에이스’ 선동열은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로 떠났고, 야수진의 기둥 김성한은 더는 현역선수가 아니었다. 이대진과 이종범, 투·타의 핵심 선수들은 방위 복무로 시즌 초 출전이 어려웠으며, 팀워크는 ‘하와이 항명’ 사건으로 깨질 대로 깨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주전포수가 골칫거리였다. 해태를 6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노지심’ 장채근은 쌍방울로 트레이드된지 오래였다. 장채근의 이적 후, 해태 안방을 책임지던 정회열 역시 1994년부터 내림세를 타더니 1995년엔 부상으로 8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선동열의 공백은 이대진으로, 김성한의 부재는 이종범으로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었지만, 주전포수의 빈자리는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김 감독이 주목한 포수가 있었다. 장채근의 트레이드 때 해태로 넘어온 ‘풀빵’ 최해식이었다.


올 시즌 해태의 후신 KIA는 삼성과 함께 우승 후보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상 중인 투수들이 많아 ‘과연 KIA가 우승까지 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1996년엔 그보다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선동열은 일본으로, 김성한은 은퇴하며 투·타에 큰 공백이 생겼습니다. 유난히 그해 스프링캠프에선 부상자도 속출했습니다. 그런데도 1996시즌 한국시리즈 우승팀은 놀랍게도 해태였습니다.

해태가 그런 팀이었어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무는 팀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해태는 ‘객관적 전력’이란 말이 통하지 않는 팀이었어요. 정신력이 엄청나게 대단했으니까요. 올 시즌 KIA는 1996년 해태에 비하면 초호화 멤버에요. 초호화(웃음).

틀린 말도 아닌 듯합니다. 1996년 해태엔 3할 타자가 이종범, 홍현우밖엔 없었습니다.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도 25홈런을 기록한 1번 타자 이종범이 유일했습니다. 대신 투수진이 꽤 견고했더군요. 이강철, 이대진, 조계현이 10승 이상씩을 따냈습니다. 여기다 신예 김상진(작고)과 마무리 김정수의 활약도 돋보였습니다.

사실 (선)동열이 형이 일본으로 간다니까 “이제 해태도 끝이구나”하는 분이 많았어요. 김성한 감독님(최해식은 김성한을 그렇게 부른다)이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빠따도 엄청 약해질 거라고 예상했죠. 그런데 어디 해태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망할 팀인가요. 어림없죠. 선수들이 더 똘똘 뭉쳤어요. 김응룡 감독님도 “동열이, 성한이 없을 때 우승해야 더 인정받을 수 있다”면서 목표의식을 심어줬어요.

사실 그해 해태 투수진의 안정은 ‘최해식의 미트 질에서 나왔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손을 가로저으며) 에이, 제가 한 게 뭐 있겠어요. 투수들이 잘 던진 공 그냥 받기만 했을 뿐인데. 과찬이에요. 그때는 정말 야구장 나가는 게 신났습니다. 아마 살면서 가장 신난 때였을 거예요.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그런데 박 기자. 젊은 야구팬 중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어요?

늦은 야구 시작, 그러나 고교시절엔 4할 타자

최해식의 고교시절(사진=최해식)

최해식. 그는 1996, 1997년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주전포수였다. 타격은 신통치 않았다. 1996년 타율 1할9푼6리, 1997년엔 2할5푼을 기록했다. 통산 타율은 2할1푼7리. 타자로선 절망적인 성적이었다.

하지만, 포수로서는 최상급이었다. 공배합, 블로킹뿐만 아니라 도루 저지도 탁월했다. 1996년 그의 도루 저지율은 4할1푼4리나 됐다. 특히나 그의 미트 질은 리그에서도 정평이 났다. 심판들은 최해식의 미트 질을 가리켜 “볼도 스트라이크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라고 평했다. 물론 일부 심판은 ”제발 좀 미트 좀 움직이지 마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알면서 속고, 속으면서 알았던 최해식의 미트질은 어쩌면 그의 인생을 축약한 것인지 몰랐다. 무명과 유명 시절을 돌고 돌아, 마침내 프로야구 선수 출신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회인으로 꼽히는 최해식(44)의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1996년 한국시리즈 우승 전까지만 해도 무명 포수였습니다. 하지만, 아마추어 때는 꽤 이름을 날리던 포수였어요. 야구는 언제부터 시작한 겁니까.

전북 이리초등학교 4학년 때에요. 그즈음 학교에 야구부가 생겼어요. 덩치 큰 학생들을 뽑아 가더라고요. 저도 그 멤버에 끼었죠. 그땐 제가 학급 실장(반장)도 할만큼 공부를 잘했어요. 안 믿기죠?

네.

진짜라니까. 워낙 공부를 잘하니까 집에서 “야구는 무슨 야구”하면서 제가 야구하는 걸 극구 말렸어요. 그래서 중학교 땐 야구를 그만둘 뻔했어요.

군산남중에서 계속 선수생활을 이어가지 않았습니까.

원래는 익산 원광중에 입학했어요. 거기서도 1학년 때 실장을 했어요. 덩치가 크니까 학교에선 유도부에 집어넣더라고. 그런데 유도보단 야구가 재밌더라고요. 사실 집에선 제가 유도하는 것도 반대했어요.

공부를 잘하셨으니까요.

그런 것도 있고, 아버지께선 “절대 운동은 안 된다”는 입장이셨어요. 우리 형제들이 다 운동선수였거든요. 큰형은 복싱, 둘째·셋째 형은 축구, 누나는 배구선수였어요. 그런데 큰형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형제들이 죄다 운동을 그만두게 됐어요(웃음). 그 바람에 막내가 운동하는 것도 아버지가 무척 싫어하셨어요.

아버지의 반대를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사흘 동안 ‘쫄쫄’ 굶었어요.

통하던가요.

“이런 독한 놈. 전학을 가든지 말든지 니 맘대로 해라”하시대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식인데 부모님 말씀을 따라야죠.

포기했습니까.

“니 맘대로 하라”고 하시는데 내 맘대로 해야지 별수 있겠어요. 저 혼자 수속 밟아서 군산남중으로 전학 갔습니다(웃음).

중학교 1학년생이 혼자 전학절차를 밟아서 익산에서 군산으로 전학 갔다고요?

그랬죠. 아버지께 말씀드리니까 “진짜 (전학)했냐?”하고 물으시데요. “했다”고 하니까 한숨을 쉬시면서 어머니한테 그러시더라고요. “후유, 안 되겠네. 막내 야구 시키세.”(웃음).

학급 실장을 했던 초교 시절(사진=최해식)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야구인생이 시작됩니다. 야구를 시작하기엔 다른 학생선수들보다 다소 늦은 나이였습니다.

확실히 실력이 달리더라고요. 중3 때까진 형편없었어요. 그러다 1983년 군산상고로 진학했는데 동기 한 명이 포수를 잘 보더라고요. 속으로 ‘애한테 밀리면 3년 내내 힘들겠다’ 싶었어요. 그때부터 공부는 포기하고 야구에만 몰방했죠. 장호익 선배의 격려도 큰 도움이 됐어요.

전 해태 포수 장호익 말인가요?

그 양반이 제 군산상고 2년 선배에요. 그땐 호익이 형이 정말 잘나가는 포수였어요. 혼자 연습하고 있는데, 절 보시더니 “네가 나보다 어깨는 좋다. 조금만 열심히 하면 ‘확’ 실력이 늘거야”하고 격려해주시더라고요. 그때 용기를 얻었죠.

하필이면 하고많은 포지션 중에 포수를 선택한 겁니까.

이상하게 포수가 나랑 맞았어요. 동료들도 저보고 “사인을 변칙적으로 잘 낸다”고 했어요. 상대 사인도 잘 맞추고. 감독님이 경기하다가 저한테 “해식아, 상대편 사인이 뭐냐?”하고 물을 정도였으니까요.

장호익의 졸업 이후 군산상고 주전포수가 됐습니다. 이때부터 전국 무대에 최해식이란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고1 때까진 무명이었어요. 실력도 그저 그랬어요. 하지만, 호익이 형이 해준 말을 잊지 않았어요. 속으로 ‘그래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내 세상이 온다’ 다짐했죠. 정말 하루도 안 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500번씩 스윙연습을 했어요. 그땐 체구가 좀 작아서 힘을 키우려고 웨이트트레이닝도 했어요. 당시만 해도 야구선수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면 안 된다고 알았거든요. 고2로 올라가니까 역시 몸에 힘이 붙더라고요. 공을 쥐는데 이건 뭐 야구공인지, 탁구공인지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1984년 고 2때 청룡기대회에서 우승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그때 우승 멤버 가운데 2학년은 제가 유일했어요. 지금은 SK 조인성 보고 ‘앉아 쏴’라고 하잖아요. 원래 원조는 나예요, 나. 고 2때 주자가 뛰면 앉아서 송구해 잡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앉아 쏴’가 오히려 득보단 독이었어요.

아니 왜요?

고2 때 세계청소년대회에 참가할 대표팀 선수를 뽑았어요. 전국 고교포수 가운데 나밖에 앉아서 송구하는 포수가 없었어요. 타격도 기가 막히게 했고. 당연히 내가 뽑힐 줄 알았죠. 그런데 이게 웬걸. 떨어진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선발위원회에서 ‘시건방지게 공을 앉아서 던진다’고 탈락시킨 거예요. 상비군 탈락하고 풀이 죽어 있는데 군산상고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해식아, 니는 말이여. 앞으론 무슨 일이 있어도 서서 던져야 혀. 절대 앉아서 던지는 사태는 없어야 한다. 알았지?”(웃음).

결국 청소년 대표팀 포수는 누가 뽑혔습니까.

지금 넥센에서 코치하는 서울고 김동수가 됐어요.

그해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는 몇 위를 했습니까.

예선탈락했어요. 슬퍼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오데(웃음).

그해 9월에 열린 한·일고교대회에는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습니다.

그땐 내가 (대표팀에) 뽑히고, 김동수가 안 뽑혔어요. 그때 기억이 지금도 선해요. 잠실구장에서 경기를 치렀는데 일본 청소년 대표팀에 괴물이 하나 있는 거예요.

괴물이요?

프리배팅을 치는데 이건 치는 ‘족족’ 다 홈런이야. 그것도 외야 센터 제일 먼 곳으로 공이 가는 거예요. 다 놀랬죠. 누군가 했더니 PL학원고의 ‘기요하라 가즈히로’라는 선수였어요. 아니나다를까 3차전에서 우리가 기요하라한테 작살이 났다는 거 아니에요. 기요하라가 홈런을 쳤는데 공이 까마득하게 날아가더라고요. 기요하라 고교 동기 구와타 마쓰미도 인상적이었어요. 난 태어나서 그런 슬라이더는 또 처음 봤다니까. 이건 뭐 마구가 따로 없었어요. 그때 얄상하게 생긴 포수도 기억나요. 그 친구 이름이 후루타 아쓰야(전 야쿠르트 감독)였어요. 후루타는 그땐 백업요원이었어요.

1984년 한일 고교친선대회가 끝나고 일본 선수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최해식(사진=최해식)

고 3땐 타격이 무척 좋았습니다.

타율이 4할을 넘었어요. 나가면 안타였으니까. 3학년 땐 그래서 야구를 할 수가 없었어요. 나를 아예 걸렸으니까. 투수들이 만루에서도 유인구로만 승부했으니까 말 다 한거죠.

고교 때 이름난 포수로 성장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좋은 포수자원이 부족했다는 걸 고려하면 프로에서 눈독을 들일만 했습니다. 아니면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등 야구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을 텐데요. 결국 건국대로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그땐 고졸 신인선수가 거의 없었어요. 프로 가는 고졸들을 봐도 거의 연습생이었어요. 어쨌거나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처음부터 대학행을 결심했어요. 원래는 원광대를 가려고 했어요.

원광대요? 전북의 야구 명문대학이지요.

원광대에서 1천200만 원을 스카우트비로 주고, 형을 학교에 취직시켜주겠다고 했어요.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이었죠. 군산상고 친구들도 다 데려와도 좋다고까지 했어요. 하지만, 전 솔직히 고대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고대에선 “500만 원이랑 친구 한 명만 받아주겠다”고 했어요. “돈은 필요 없으니까 동기들을 더 받아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니까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건대의 조건은 뭐였습니까.

1천만 원 주고, 동기 3명을 받아주겠다는 조건이었어요. 그래 제가 “한 명 더 받아주십시오”하고 졸랐어요. 야구부 동기 중에 새어머니랑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참 사정이 딱했거든요. 결국 건대에서 그 친구까지 받아주겠다고 했어요. 대신 스카우트비는 500만 원으로 떨어졌죠. 아,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건대랑 가계약서를 쓰고 난 다음날. 세상에! 집으로 고대 최관수(작고) 감독님이 찾아온  거예요. “원래는 너랑 동기 한 명만 받기로 했는데, 네 동기 한 명을 더 받아줄 테니 암말 말고 고대로 오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이미 건대 입학을 결정했는데. (혀를 차며) 그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 같아요(웃음).

쌍방울 1차 지명자, 최해식

군산상고 시절 전국대회 우승 후, 지프차에 올라타 카퍼레이드를 준비 중인 최해식(사진 맨 뒷쪽. 사진 맨 오른쪽 이가 조규제다(사진=최해식)

늦은 나이에 시작한 야구. 무명의 중학 시절. 그러다 고교 때 주목받기 시작한 최해식은 건대에 입학하면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눈을 뜰 수 없는 빠따질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건대에 입학했습니다.

스포트라이트만 받은 게 아니에요. 선배들의 빠따질도 받았어요. 그때 선배들이 죄다 마산, 경주 출신이었어요. 경주 선배들은 참 잘해줬는데, 마산 선배들은 참, 사람을 힘들게 했어요.

지역감정 때문이었나요?

내가 입학하기 전에 4학년 선배들이 거의 전라도 출신들이었어요. 그 선배들한테 마산 선배들이 그렇게 맞았나 보더라고. 그런데 그보다 더 고약한 선배들은 서울 출신들이었어요(웃음). 제가 입학했을 때 서울 출신 선배들이 묻더라고요. “너 로켓이 왜 빠른지 아냐?”고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X구멍에 불이 나서 빠릅니다.” 그러니까 선배들이 “오호, 전라도 출신이라 잘 아네”하면서 그때부터 빠따로 때리더라고요. 와, 진짜 엄청 맞으면서 운동했어요. 야구를 그만두고 싶더라고.

어떻게 버텼습니까.

‘내 더러워서 야구 안 한다’하고 하루하루를 버텼는데 어느덧 돌아보니까 4학년이 됐더라고요. 그때 신입생으로 이종범이 입학했어요.

KIA 이종범이요?

그렇죠. 걔한테 잘해줬어요. (이)종범이도 고교 때 야구를 잘해서 고·연대는 갈 수 있는데, 나처럼 동기들 3명 데리고 건대로 입학한 케이스였어요.

1989년 건대 졸업반 때 프로 지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김동수, 임형석(이상 한양대), 이병훈, 김경기(이상 고려대), 김경원(동대문상고), 공필성(경성대), 이태일(영남대), 정회열(연세대) 등 쟁쟁한 선수들이 신인지명회의에 참가했습니다. 놀랍게도 쌍방울은 1차 지명자로 최해식을 호명했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1차 지명,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해태가 절 지명했으면 정말 노래라도 불렀을 겁니다. 그런데 쌍방울이지 뭐에요. 속으로 ‘아따 좀 늦게 창단하지, 하필 나 프로 지명받을 때 창단하고 그랬샀냐’ 하면서 원망도 했어요. 저는 솔직히 해태의 빨간색 유니폼을 입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그게 날아갔으니 얼마나 착잡했겠어요.

쌍방울로부터 계약금으로 1천600만 원을 받았습니다.

실제론 1천200만 원이에요. 구단에서 “돈이 없다”고 400만 원을 깎았어요.

그래요? 그때만 해도 쌍방울이 그렇게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절은 아니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그런 편이었죠. 그래도 돈은 정말 징그럽게 안 썼어요. 쌍방울 있으면서 호텔 사우나 이용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동네 목욕탕 갔지. 밥도 호텔 라운지가 아니라 회관에 가서 전주비빔밥 먹었어요.

1차 지명자였기에 기대가 큰 게 사실이었습니다. 1990년 쌍방울이 2군 리그에서 뛰고 1991년부터 1군 리그에 진입했는데요. 하지만, 1991년 4경기, 1992년 3경기, 1993년엔 18경기만 출전했습니다.

1991년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 몸이 좋지 않았어요. 이상하게 졸리데요. 병원에 갔더니 간 수치가 엄청 높으니 한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으라고 했어요. 알고 보니까 간염이었어요. 그거 치료하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OB에서 뛰던 김호근 선배가 트레이드돼 쌍방울로 왔어요. 그래도 참고 또 참아서 주전 자리를 확보하려 했는데, (씁쓸한 표정으로) 이번엔 롯데에서 뛰던 전종화가 오지 뭐에요. 김인식 감독님이 날 못 믿었던 거예요. 그렇게 1994년 5월까지 쥐 죽은 듯이 살았어요.

그래도 쌍방울에서 빙그레 에이스 이상군의 공을 받아쳐 홈런도 치고 그러지 않았나요.

그랬죠(웃음). 1993년 청주구장이었을 거예요. 오랜만에 선발로 출전했어요. 2회 2사 1, 2루인데 노스트라이크 쓰리볼이었어요. ‘볼넷으로 나가야겄다’ 싶었죠. 그런데 벤치에서 자꾸 치라는 사인이 나오는 거예요. 이상하다 싶어 뒤를 봤죠. 다음 타자가 송인호인 거예요(웃음). 송인호나 나나 뭐 타율은 1할대였으니까.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하고 휘둘렀는데 3점 홈런이 된 겁니다. 그걸로 빙그레한테 이겼어요. 쌍방울에서 3년간 있으면서 기록한 유일한 홈런과 타점이었죠.

1994년 6월 삶의 큰 변화가 찾아옵니다. 해태 주전포수 장채근과 트레이드된 것인데요.

사연이 있어요.

어떤?

트레이드 되기 전, 쌍방울에서 뛸 때 외야 플라이를 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고 있었어요. 절 보고 모 코치님이 “수고했어, 잘했어”하는 거예요. 간만에 나간 타석에서 외야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나 마음 상해 죽겠는데 “잘했어”하니까 성질이 ‘팍’ 나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더니 그 코치님이 발로 내 얼굴을 차지 뭡니까.

이런.

하마터면 실명될 뻔했어요. 여기 보세요. 상처 보이죠? 지금도 눈에 선명하게 상처가 남아있어요. 진짜 야구를 그만하고 싶더군요. 명색이 프로선수인데 맞으면서 야구하는 건 정말 아니지 싶었어요. 쌍방울도 코치의 폭행으로 제가 다친 게 부담스러웠나 봐요. 해태랑 이야기해서 트레이드를 진행하더군요. 돌아보면 오히려 그 사건이 제 인생에 있어서 큰 기회가 된 것 같아요.

정든 쌍방울을 떠나 해태로 이적했는데. 그때 기분이 다소 착잡했겠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전혀요.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어요. 쌍방울에선 도저히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또 꿈에 그리던 해태고.

건대 시절 최해식(사진=최해식)

해태는 쌍방울보다 주전 기회를 잡기 힘든 팀이었습니다. 주전 포수 자리에 장채근은 떠났지만, 정회열이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정)회열이는 저와 동기에요. 고교 때는 솔직히 제가 회열이보단 잘했습니다. 그런데 해태에 오니까 과거의 그 정회열이 아닌 거예요. 동기가 해태로 왔는데 아는 척도 안 하더라고요(웃음).

당시 정회열은 장채근을 트레이드 시킬 만큼 해태의 차세대 포수로 각광받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회열이면 해볼 만 하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995년 방위복무 소집해제하는 날, 구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전주로 빨리 오라”고. “왜요?”하니까 “전날 포수들이 도루를 엄청 내줬다”고 하더라고요. 공교롭게 그날 상대가 쌍방울이었어요. 속으로 칼을 갈았죠. 주자들 뛰는 ‘족족’ 다 잡아냈습니다. (주먹을 꽉 쥐며) 진짜 통쾌하더라고요.

‘해태로 가고서 사람이 변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쌍방울 있을 땐 제가 미련할 정도로 착했어요. 해태로 오면서 독하게 마음 먹었죠. ‘내 인생을 방해하는 것들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요. 그런 소리 듣는 것도 당연했다고 봐요.

1995년 드디어 해태 주전포수 자리를 꿰찼습니다.

그해 정회열이 부상이었어요. 제 송구가 좋았던 것도 김응룡 감독님의 눈엔 긍정적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얼마나 송구가 좋았던 겁니까. 포구하고 2루까지 송구하는데 1.6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도 있던데요.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빠른 포수라는 평도 얻었습니다. 사실 1.60초면 미국이나 일본 프로야구의 A급 포수에 해당합니다.

제가 봐도 미트에서 공을 빼 2루까지 던지는 시간이 무척 빨랐어요. 도루 걱정이 덜하니 투수들이 마음 놓고 공을 던질 수 있었죠.

주전포수 낙점에 다른 이유도 있지 않았나요.

결정적 계기는 (선)동열이 형이었어요. 1995년이면 동열이 형이 일본 가기 바로 전(前) 시즌이었어요. 그때 제가 듣기론 동열이 형이 이상윤 투수코치님한테 “내가 등판할 때 해식이를 포수로 내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아요.

김응룡 감독도 허락했나 보군요.

그땐 김 감독님보다 동열이 형 파워가 더 셌을 때에요(웃음).

말이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 선동열 감독의 현역 시절 공이 어느 정도로 위력적이었습니까.

(엄지를 세우며) 최고였죠. 지금도 그런 공을 던지는 투수는 대한민국에 없어요. 속구를 던지면 공이 타자 앞에서 ‘확’ 떠올랐다니까요. 슬라이더도 기가 막혔어요. 타자 앞에서 ‘획’하고 꺾이는데, 내가 다 무서울 정도였어요.

선동열을 비롯해 해태 전설적인 투수들의 공을 잘 받아주셨는데요. 전성기 시절 이대진은 어땠습니까.

(이)대진이는 속구도 좋았지만, 포크볼이 일품이었어요. 타자들이 스트라이크인 줄 알고 스윙했다가 차례로 삼진 먹고 들어갔으니까요.

고 김상진의 공도 많이 받으셨지요?

(김)상진이는 속구 하나만 던졌어요. 공 끝이 기가 막히게 좋았거든요. 진짜 걔는 변화구가 필요 없을 정도였어요.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오른 듯 눈시울을 붉히며) 상진이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 후유-

‘싸움닭’ 조계현도 해태의 전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제가 (조)계현이 형 공을 받을 땐 이미 그 형 직구 구속이 떨어졌을 때에요. 그래도 싱커가 참 좋았어요. 그걸로 땅볼 아웃 많이 기록했죠. 변화구는 거의 못 던지는 게 없는 투수였어요.

그래서 ‘팔색조’로 불리지 않았습니까.

1년에 하나씩 새로운 구종을 추가하는 거 보면 정말 대단했어요. (뭔가 생각난 듯) 하루는 계현이 형이 그러는 거예요.

뭐라고요?

“오늘은 팜볼을 결정구로 던지겠다”고요. 그때 제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글쎄요.

“형, 팜볼은 무슨 팜볼이야. 공에 힘이 없어서 느리게 오는 거지.”(웃음). 대뜸 “야, 어디 가서 그런 소리하지 마” 하더라고요(웃음).

쌍방울에 막 입단했을 때(사진=최해식)

가장 까다로운 투수는 누구였습니까.

누구긴 누구예요. 까치지.

‘까치’ 김정수요?

(김)정수 형은 포수 사인은 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던졌어요.

그게 가능합니까.

실컷 사인 내면 고개 돌리고 자기가 던지고 싶은 공을 던져 버려요. (입을 벌리며) 와, 포수로선 환장할 일이죠. 그때 정수 형 커브가 좀 좋아요. 갑자기 커브가 들어오면 당황하게 돼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다 잡아줘야지. 최상덕도 참 까다로운 투수였어요. 그 친구는 진짜, 진짜, 진짜 인터벌이 길었어요. ‘언제 던지나’ 기다리다 지친다니까(웃음).

‘역대 최악의 전력’ 해태,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하다.

선동열, 김성한이 빠지고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해태(사진=최해식)

1996년 해태는 ‘역대 최악의 전력’이란 소릴 들으면서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합니다.

사실 동열이 형 빠지고, 김성한 감독 은퇴하고, 참 힘들었어요. 제가 앞에서도 말했죠. 지금 KIA 전력은 초호화라고. 그래도 해태는 강했어요. 1996년도 시즌 초반엔 약했는데. (이)대진이랑 (이)종범이 방위 마치고 돌아오니까 ‘확’ 팀이 달라졌어요. 종범이, 그 녀석은 정말 대단한 선수였어요. 1회 시작하고, 잠깐 라커룸에 있으면 밖에서 “와, 와”하고 함성이 나요. 그럼 분명히 종범이가 뭘 하나 친 거예요. 후배한테 물었을 때 종범이가 안타를 쳤으면 그날 경기는 좀 늦게 끝나는 거고, 홈런을 쳤으면 빨리 끝나는 거예요. 아무리 이빨 빠지고, 손톱 빠진 호랑이라도 그때도 해태가 얼마나 강했으면 선수들이 경기 중간 클리닝 타임 때 짬뽕을 시켜먹고 그랬다니까요(웃음).

제 기억에 해태는 참 경기 시간이 짧았던 팀입니다. 강팀이라면 이기기 위해 더 다양한 수를 쓸텐데, 해태는 뭐랄까요. 타자들은 초구부터 치고, 투수들은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잡는 게 일상이었다고나 할까요.

맞아요. 해태 선수들은 팀이 이기면 그만이었어요.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으면 선배들이 인상 쓰면서 그래요. “야, 타석에 나가서 커트 같은 거 하지 말고 빨리 끝내라잉~” 그만큼 해태가 강했던 거죠. 물론 개인 타이틀이 걸린 친구들은 확실히 밀어줬죠.

1996년 해태의 전력도 강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현대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해 해태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였죠. 반면 신생팀 현대는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월등했어요. 부자 구단이었으니까요. 사실 현대는 심판 덕도 많이 본 팀이었어요.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한테 이기고, 플레이오프에서 쌍방울이랑 만났는데, 전력상으론 쌍방울이 더 좋았어요. 하지만, TV 중계를 보는데 이상하게 현대한테 스트라이크 존이 유리한 거예요. 우리랑 붙었을 때도 허, 계속 이상한 거예요. 특히나 해태가 3승2패로 앞선 한국시리즈 6차전에선 우리 투수가 던지면 아예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공도 볼로 선언되고 그랬어요. 그러다 6차전 8회 1사 2루에서 사건이 터졌죠.

어떤.

이번에도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들어온 공이 볼로 선언된 거예요. 앞선 이닝에서도 볼 판정 때문에 구심과 승강이를 벌였는데,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구심은 “한 번만 더 까불면 퇴장이야”라고 했지만, 분을 삭일 수가 없었어요. 마침 김응룡 감독님이 벤치에서 “야, 너도 그냥 받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도대체 볼 카운트를 몇 개나 장난치는 거냐”고 따졌죠.

구심이 뭐라던가요.

“퇴장!” 하죠. 퇴장 당하면서 벤치로 들어오는데 얼마나 억울한지.

광주구장도 난리가 났지요.

관중석에서 쓰레기통 날아오고, 심판 욕하는 소리 들리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때론 한 선수의 퇴장이 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퇴장은 한국시리즈 사상 첫 퇴장이었습니다.

저도 그 걱정을 했어요. 8회 1사 1, 2루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불안해요. 가뜩이나 2대 1로 앞섰지만, 한방이면 역전될 판이었으니. 타자가 또 김경기였어요. 솔직히 그땐 ‘오늘 지면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김경기면 당시 현대의 중심타자였는데요.

그랬죠. 혼자 라커룸에 있는데 갑자기 “와!”하면서 손뼉소리가 나는 거예요. 나가보니까 세상에! 김경기가 병살타를 쳤지 뭐에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때 현대한테 점수를 내주지 않은 게 해태가 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어요.

1996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최해식은 구심의 볼 판정에 항의하다 퇴장당했다. 한국시리즈 사상 첫 퇴장이었다(사진=최해식)

1997년엔 파트너를 LG로 바꿔 한국시리즈에서 일전을 치릅니다. 역시 우승은 해태 차지였습니다.

솔직히 그해 한국시리즈는 진짜 편하게 했어요. LG한테 4차전까지 3승1패로 앞섰어요. 5차전에서도 5회까지 6대 1로 앞서고 있었죠.

6대 1이면 우승이 눈앞이었는데요.

그래도 긴장이 되더라고요. 아, 그런데 LG가 쉽게 포기하더라고요. 타자들 방망이가 안 나오지 뭐에요. 그때 우리 투수가 김상진이었는데, 상진이한테 “속구만 던지라”고 했어요. 어차피 쳐도 다 땅볼이었으니까요. 실제로 LG 타자들은 땅볼만 치다가 한국시리즈를 끝냈어요. 확실히 LG는 한 번 할 때는 ‘확’ 달라붙는데 포기할 때도 ‘확’ 꺼지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지금도 LG가 왜 그리 빨리 포기했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팀이 긴장하면 상대 팀도 긴장한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어쨌거나 해태는 1996, 1997년 한국시리즈 2년 연속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그 중심엔 주전포수 최해식이 있었습니다.

그때 연봉도 7천800만 원까지 올랐어요. 보너스도 A급 대우로 받았고요. 우승하니까, 참 좋습디다. ‘이 맛 때문에 해태 선수들이 한국시리즈만 되면 날아다녔구나’ 싶더라고요.

‘야지’의 대명사 최해식

해태 시절의 최해식(사진=최해식)

최해식은 ‘야지’의 대명사였다. 야지(野次)는 일본말로, 뜻은 ‘야유’다. 야구계에선 포수가 타자를 괴롭히려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걸 ‘야지’라고 한다. 재미난 일화가 있다. OB 정수근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다. 최해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수근의 타격 타이밍을 빼앗을 요량으로 ‘야지’를 시작했다.

“어이, 수근이. 초구부터 쳐라. 그래야 빨리 경기 끝나고 집에 가니까.”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정수근은 초구를 치지 않았다.
“어, 그래. 공을 계속 보겠단 말이지. 좋았어. 너 이번에도 안 치면 혼 난다.”
‘야지’에 넘어갈 정수근이 아니었다. 말로만 “네, 이번엔 믿어주십시오”라고 했다.
결국 정수근은 2구도 치지 않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최해식은 “너, 조심해라. 3구는 네 머리로 올테니까”라고 으름장을 놨다. 장난기 하면 정수근도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이번엔 진짜 믿어주십시오. 자, 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수근의 배트는 돌아가지 않았다. 정수근이 최해식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선배님. 코스 하나만 알려주시면 치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어딥니까?”
최해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디긴, 니 머리지.”
실제로 4구는 정수근의 머릴 향해 날아왔다.


과거 야구선수들한테 들어보면 “최해식은 이만수의 뒤를 잇는 ‘야지의 왕’이었다”라고 하더군요.

정말 말 많이 했어요. 타자들이 꼽는 가장 짜증나는 포수가 나였으니까요(웃음).

그런데 프로 선수들이 포수가 뭐라 한다고 해서 그 말에 정말 현혹되고 그럽니까.

그럼요. 옛날 삼성 타선이 얼마나 좋았어요. 2사 1, 2루에 이승엽이 나오면 일부러 (이)승엽이를 걸려요. 그럼 4번 양준혁이가 입이 대빨로 나와서 타석에 서요. 그럼 뭐라는 줄 아세요. “아니 1, 2루에 타자를 거르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해요. “분하면 니가 치면 되잖아” 해버려요. 그럼 (양)준혁이가 “아, 돌겠네” 하죠(웃음). 그때 이미 타자는 기분이 상한 거예요. 그래도 양준혁이면 삼성의 레전드인데, 후배를 고의사구로 보내고 자기랑 정면대결하면 자존심이 구겨지죠. 그걸 이용한 거예요. 아니나다를까 2루수 앞 땅볼 치고 죽어요(웃음). 우즈도 나한테 많이 당했죠.

OB에 있었던 타이론 우즈요?

(고개를 끄덕이며) 우즈가 나 때문에 야구 못하겠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어떻게 했기에 우즈가 그런 말까지 한 겁니까.

우즈가 타석에 서면 “You hit outside~(너 바깥쪽 공 칠거지)"라고 해요. 가뜩이나 방망이가 안 맞고 있을 때라, 우즈 신경이 날카로웠거든요. 또 그 친구가 굉장히 소심했어요. 대뜸 ”Shut up(입 다물어)"하고 반응이 와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다음 타석 때 또 만나면 “Hi, T(안녕, 티)”하고 불러요.

T요?

그게 우즈 별명이었어요. 제가 불러도 그땐 못 들은 척해요. 다시 “Oh, My friend(오, 나의 친구)”라고 하죠. 그럼 우즈가 “Shut up”하고 발끈해요. 그때 제가 다시  “You hit outside?”하면 우즈도 포기하고 “I know, I know(알았어, 알았어)” 해요(웃음).

우즈에게 보복당하진 않으셨어요?

왜 안 당해요. 한 번은 우즈가 홈으로 달려오다가 저랑 ‘쿵’ 부딪혔어요. 이야, 진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제가 3m까지 날아갔다는 거 아니에요(웃음).

그래도 경험 많은 베테랑은 잘 속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왜 안 속아요. 다 속죠. 1997년인가 해태가 정규 시즌 1위를 눈앞에 뒀을 때에요. 롯데하고 붙었는데 2사 만루에 공필성이 나왔어요. (공)필성이하곤 친구거든요. 필성이가 타석에 서자마자 “니네 뭐하려고 기를 쓰고 이길라꼬 하노” 하더라고요. 그때가 0대 0이었는데, 제가 그랬어요. “그래? 알았어. 야, 시원하게 쳐버려”.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시늉을 하며) “뭐 던지는데?” 하는 거예요.

그래서요.

“직구” 그랬죠.

직구가 날아왔습니까.

커브가 들어왔죠(웃음).

반응이 어떻던가요.

인상이 싸해지면서 “니 조용히 해라” 하더라고요(웃음). “에이, 농담도 못하냐. 이번엔 진짜 직구야”했죠.

속던가요.

지가 안 속으면서 어쩔 건데요(웃음). “진짜 직구야?” 하더라고요. 그래 “거짓말이면 내가 니 동생이여”했죠. 그런데 또 커브가 들어왔어요. 필성이가 우락부락한 얼굴로 “야, 니 진짜 조용히 해라”하는 거예요. 그래 제가 그랬죠. “알았어. 인마. 이번엔 진짜 커브야”. 그러다 진짜 커브가 들어왔어요. 삼구 삼진!(웃음)

공필성이 뭐라고 하던가요.

“야이 개자슥아. 니 내가 조용히 해라, 했나 안 했나!”(웃음). 그때 우리가 간신히 1대 0으로 이겼어요.

하하. 이번엔 보복이 없었나요.

다음날 박영태 코치님이 “해식이, 너 정말 그럴 끼가”하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했죠. “마, 지금 우리가 꼴찌아이가.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뭐꼬. 니 인마, 내년에 함 보자” 하시더라고요.

내년에?

“어떻게 하시려고요. 코치님” 하니까 “니 머리 조심해라” 하시더라고.

긴장 좀 됐겠습니다.

긴장은요. 제가 누굽니까. “아이고 코치님. 전 한 명이지만, 롯데 타자는 9명이 나오잖아요. 어쩔 쓸까나”했죠. 코치님도 기가 막힌지 “저, 저거, 저 꼴통”하시고 웃으시더라고요.

미트를 내리고, 철가방을 들다.

중국집 '최고루'를 운영 중인 최해식. 그는 배달과 홀 서빙, 요리 등을 모두 겸한다

해태 신화도 1997년을 마지막으로 운명을 다한다. 그해 우승을 마지막으로 해태는 KIA로 주인이 바뀌었고, 소다수처럼 시원했던 해태 야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최해식 역시 2000년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2000년이면 해태의 마지막 시즌이었습니다. 공교롭게 그해 사실상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때 이미 어깨가 엉망이 된 상태였어요. 포수가 없어서 더블헤더까지 저 혼자 뛰었으니, 골병이 생길 만도 했죠. 그래도 구단에서 은퇴 권유할 땐 서운하대요. ‘이제 돈 좀 벌려고 하니까 은퇴하라’고 하는구나 싶었죠. 그 즈음 김상훈이 입단했어요. 어쩌겠어요. 김성한 감독님이 “이제 코치해라”고 하시니 해야죠. 2001년부터 배터리 코치를 시작해 2003년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아마추어 감독도 했다가 야구판을 나왔죠.

진필중은 한때 KIA 유니폼을 입었다. 한 번은 훈련 중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주전자를 들고 배터리 코치 최해식이 다가왔다. “필중이 목 마르지?” 마침 목이 타던 진필중은 엉겁결에 컵을 들었다. “천천히 마셔야 해. 알았지.” 최해식의 호의에 진필중은 컵을 들어 단번에 목 안으로 털어 넣었다. 순간. “?Z, ?Z”하면서 진필중이 입 밖으로 물을 뱉어냈다. “그러니까 천천히 마시라고 했잖여. 오메, 아까운 거 다 흘렸네.” 최해식이 짖궂은 표정으로 지나가자 진필중은 그제야 컵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소주였다.

코치였을 때도 참 괴짜였던 듯합니다.

선수들 재밌게 해주려고 한 거죠(웃음).

배터리 코치 시절 김상훈과 차일목의 훈련을 도와주셨죠.

사실 그때 (차)일목이가 선수생활을 포기하려고 했어요. 제가 말렸죠. 일목이는 방망이가 참 좋은 친구였어요. 그런데 공배합을 무지하게 급하게 했어요. “속구 구속이 빠르고 제구 좋은 투수들이나 외국인 투수들한테는 통하지만, 일반 투수들한테는 무리”라고 몇 번을 말했어요. 반면 (김)상훈이는 돌다리도 두들겨 건너는 성격이었어요. 이상하게 상훈이가 포수로 나오면 투수들의 투구수가 많아지고, 일목이나 나오면 피홈런이 많아졌어요. 그래 제가 둘을 붙잡고 뭐라 했는지 아세요.

뭐라고요?

“니네 둘이 한번 살아봐라. 그럼 반반씩 닮지 않겠냐”(웃음). 그런데 절충이 안되더라고요.

코치직에서 물러나고 다른 팀 배터리 코치로 가지, 왜 야구계를 떠난 겁니까.

2005년 1월이었어요. 하일성 KBS 해설위원님이 “서울 올라와서 야구해설을 하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러려고 준비를 다 마쳤어요. 그런데 아내가 자긴 광주에 남겠다고 하지 뭐에요. “뭐하러 당신 혼자 남아?”했더니 “부업을 하겠다”는 거예요. “부업은 뭔 부업이여”하니까 뭐라는 줄 아세요?

?

세상에, 이틀 전에 중국집을 계약했다지 뭡니까.

중국집이요?

그렇다니까요. 기가 차더라고요. “자네 계약금 줬는가?” 하니까 줬다는 거예요. “포기혀. 자네가 내 야구인생을 아예 끝장내려 하는구먼”했죠.

왜 그렇게 반대하신 겁니까.

중국집 운영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 주방장들도 자주 바뀌고, 배달도 해야 하고. 마침 중국집을 하던 친구가 있어서 찾아갔어요. “중국집 하면 얼마나 버냐”했더니 “”이거 진짜 힘든 일이야. 여자 혼자는 못한다“고 하는 거예요. 어쩌겠어요. 계약금은 이미 냈지, 집사람을 혼자 두고 올라갈 수도 없지. 그날부터 친구 중국집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해 반죽 미는 것까지 배웠어요.

요리 기술을 배우는 게 야구보다 쉬웠습니까.

옛날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해요. 진짜에요. 엄청 고생했어요. 야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들었어요.

뭐가 가장 힘드셨어요.

처음 오픈한 가게는 지금 가게보다 훨씬 작았어요. 요릿집도 아니고, 배달로 먹고 살아야하는 가게였어요. 그런데 주변 중국집 견제가 말도 못하게 심했어요. 우리 배달 오토바이를 훔쳐가지 않나, 몰래 타이어에 빵꾸(펑크)내고 도망가지 않나, 돌을 던져서 가게 유리창도 깨고, 심지어는 가게 문을 따고 들어와 술이며 밀가루를 ‘싹’ 훔쳐간 적도 있어요.

그래 범인은 잡았습니까.

하도 억울해서 6개월 동안 가게에서 숙식하면서 범인을 잡으려고 노력했어요. 결국 잡았죠. 대뜸 자기 중국집 주인이 시켰다는 거예요.

그 중국집에 찾아갔습니까.

갔죠. “내가 요릿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구멍가게만 한 중국집을 운영하는데 당신들 그렇게 내가 겁나? 앞으로 당신 중국집 유리창 깨지면 내가 한줄 알아!”하고 으름장을 놨어요. 나중엔 자기들이 찾아와서 같은 모임에 참여하라고 하더라고요.

참여했습니까.

한 번 나갔는데 이건 완전 상종 못 할 사람들이었어요. 고작 나한테 알려준다는 게 경쟁 중국집 오토바이 고장 내는 법이나 남의 중국집 그릇 발로 차서 부수는 거였어요. “에끼, 이놈들아”하고 나와버렸죠.

왕년의 해태 포수 최해식은 이젠 광주지역에서 알아주는 사업가다. 은퇴하고 더 성공한 남자이기도 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초창기 매상은 어땠습니까.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매상이 생각보다 안 오르는 거예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9시면 공사판을 돌면서 전단을 돌렸는데도 말이죠. 하루는 어떤 공사현장에 갔는데 현장 감독하시는 분이 그러는 거예요. “아니 다른 중국집 주인들은 새벽 6시부터 찾아와서 따뜻한 보리차 돌리면서 전단을 나눠주는데 왜 자네는 9시에 오느냐”고요. 그때 깨달았죠. 난 열심히 산 게 아니라 열심히 사는 시늉만 했다는 걸.

음.

다음날부터 제가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새벽 5시 30분에 찾아와 전단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공사현장에서 인부들 보면 “안녕하십니까. 최고루입니다. 많이 이용해주십시오”하고 허리를 90도로 꺾었어요. 하루하루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인부들도 “오늘은 일찍 나왔네”하면서 “점심때 짜장면 40개 들고 와”하더라고요. 짜장면 40그릇이면 매상이 20, 30만 원은 훌쩍 넘거든요. 그렇게 조금씩 단골을 확보하기 시작했어요.

전직 프로야구 선수, 그것도 해태 우승을 이끈 주전포수가 철가방을 들고 배달할 때 알아보는 이들이 꽤 많았을 것 같은데요.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을 듯싶습니다.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자존심을 버리는 게 정말 힘들더라고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토바이 타고, 철가방 들고 다니면 다 반말이에요. “야, 인마. 거기 신문지 깔고 음식 올려”, “야, 자식아. 왜 이렇게 배달이 늦어”하는 건 양반이에요. 그럴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네, 네”밖에 없어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않는 일화가 있어요.

뭡니까.

우리 중국집 근처에 가구점들이 많았어요. 그중 한 가구점에서 “짜장면 곱빼기 하나 가져오니라. 배달 늦으면 바로 취소여” 하더라고요. 부리나케 달려갔는데 가구점에 손님이 있더라고요. 철가방에서 짜장면을 빼려고 하는데 갑자기 가구점 주인이 “뭐허냐. 짜장면 안 시켰는디” 그러는 거예요. “사장님 목소리 맞는데 왜 그러세요”해도 곧 죽어도 아니라는 거예요.

당황했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횡단보도 앞에 있는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눈시울이 붉어지며) 매일 반말 듣고, 무시당하면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싶은데 참…. 그래도 가게 앞에서 눈물 다 닦고 아무렇지 않게 들어갔어요. 종업원이 쳐다보기에 “안 시켰다고 하네”했죠. 그때 종업원이 그럽디다. “사장님 화나셨죠.” 다음 말이 걸작이었어요.

뭐라고 했기에.

“다시 짜장면 가져오라는데요.”

세상에.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성질이 ‘팍’ 나더라고요. 전화 걸어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어. 음식 갖고 장난하면 천벌 받아. 내가 사람들한테 다 말해서 니 가구점에 가구 사러 가지 말라고 할거여. 알았어!”하고 쏘아붙였죠.

미안해하던가요.

찾아와서 사과하더라고요. 그다음부터 주변 가구점들이 다 우리 집에서만 시켜먹었어요.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

최해식의 별명은 ‘풀빵’이다. 얼굴이 풀빵처럼 둥글둥글하다고 김응룡 감독이 지어줬다. 얼굴도 둥글둥글, 성격도 둥글둥글한 까닭에 그는 프로 시절 갖가지 역경과 고난이 찾아와도 둥글둥글하게 살아왔다. 특별히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라운드 밖의 삶은 풀빵처럼 둥글둥글하게 살기엔 너무나 가혹했다. 그는 쌍방울에서 해태로 이적할 당시의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내 인생을 가로막는 방해자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역경과 고난이라는 방해자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의 무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오직 ‘노력’뿐이었다.

듣자하니 요리 솜씨도 수준급이라고 하던데요.

이유가 있어요. 중국집 주방장 중에 별난 사람들이 많아요. 좀 뭐라 하면 “딴 가게 알아보겠다”고 짐 싸들고 나가고. 주방장 관리하는 게 코치 때 선수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요. 특히나 한창 바쁠 때 주방장들이 튕기면 진짜 난감해요. 하도 주방장들 때문에 속을 썩이다보니까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독학으로 요리를 배웠단 말입니까.

주방장이 하는 걸 등 너머로 보고, 일당 주방장이 오면 ‘요리 좀 가르쳐달라’면서 조금씩 배웠어요. 영업이 끝나면 밤마다 혼자 주방에서 채소 썰기 연습을 했어요. 30kg 이상 나가는 프라이펜을 들고 볶음 연습도 했죠. 해태 시절 경쟁 포수를 떠올리면서 ‘내가 언젠가는 널 제친다’고 다짐했듯이 혼자 조리 연습을 하면서 주방장을 떠올렸어요.

무협영화에 나올 법한 복수 준비인데요.

2005년 여름이었을 거예요. 아니나다를까 주방장이 또 “아, 못해 먹겠네”하면서 성질을 부리더라고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겠습니다.

“그래요? 못해 먹겠단 말이죠. 알았어요. 프라이펜 줘봐요”하고는 주방장이 들고 있던 프라이펜을 빼앗아 보란 듯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영업시간 끝나고 주방장이 찾아왔어요. “미안하다”고 하데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오늘부터 인건비 아끼게 됐는데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했습니다(웃음). 9회 말 2사 만루홈런보다 더 통쾌하더라고요(웃음).

독학으로 요리법을 배우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조미료 덜 치고, 국물 개운하게 하니까 고객들이 더 좋아하시더라고요. 사실 짬뽕 국물 개발하려고 별짓을 다 했어요. 결국 닭뼈 국물에 무를 집어넣으니까 담백한 맛이 나데요. 고춧가루 대신 비싸더라도 청양고추를 넣은 것도 효과를 봤어요.

 자신이 운영하는 중화요릿집에서 포즈를 취한 최해식(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야구헬멧 대신 안전모, 미트 대신 오토바이 운전대를, 배트 대신 철가방을 들었지만, 최해식의 인생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현역시절 공배합을 연구하듯 수익 확대를 위해 날마다 새로운 무언가를 떠올리며 실천했다. 그의 중국집 대박 비결은 바로 참신한 아이디어 발굴과 지체 없는 실천에 있었다.

박 기자 혹시 짬짜면 알아요?

짬뽕과 짜장면을 반씩 먹는 요리 아닌가요.

그 짬짜면을 내가 맨 먼저 개발했다는 것도 알아요?

그건 몰랐는데요.

7, 8년 전 우리 가게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거예요.

짬짜면을요?

그렇다니까요. 어느 날 손님들이 오셨는데 메뉴판을 보면서 ‘짬뽕을 먹을까, 짜장면을 먹을까’ 고민을 하더라고. 그때 마침 누가 이상한 그릇 하나를 가져왔어요. 안을 보니까 그릇이 반으로 나눠어 있는 거예요. 그때 ‘아, 한쪽에 짬뽕, 다른 한쪽에 짜장면을 넣으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바로 메뉴를 만들고 팔았죠. 결과요? 볼 거 있나. 완전 대박이었지(웃음).

이뿐이 아니었다. 한창 포장 랩에서 환경호르몬이 검출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갑자기 가게 매출이 ‘뚝’ 떨어졌다. 환경호르몬에 놀란 고객들이 배달 음식 먹기를 주저한 까닭이었다. 누가 봐도 위기였다. 하지만, 최해식은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겁니까.

고객들이 포장 랩 때문에 배달을 시키지 않으면, 그 걱정을 덜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포장 랩을 전부 버리고, 그릇에 뚜껑을 덮었어요. 요즘이야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중화요리 그릇에 뚜껑을 덮는 집이 없었거든요. 돈도 들고, 귀찮기도 하지만, 뚜껑을 덮기 시작하니까 매출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어요.

고객정보 프로그램도 만들었다고요.

중국집은 단골 싸움이에요. 누가 단골이 많으냐에 따라 성패가 갈려요. 단골을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고객관리를 하기로 했어요. 부산에서 고객관리 프로그램을 구해 전화기 옆에 설치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었나요?

요즘은 많이 보급됐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중국집에 전화 걸었을 때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하고 묻는 게 아니라 가게에서 먼저 “주소가 어디 어디시죠”하는 말하는 거요.

아, 네.

가게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하면 고객들은 “아, 그걸 어떻게 아셨죠”하면서도 뭔가 모르게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받아요. 사실 고객들이 한 번 배달을 시키면 그 전화번호와 주소가 고객프로그램에 저장돼 다시 전화 걸었을 땐 주소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거든요. 지금도 전 기존 고객들에게 맛난 음식이 있으면 문자메시지를 보내요. 그 문자를 보고 찾아오신 분들한텐 음식값도 깎아 드리고, 서비스도 드려요. (물 한 모금을 마시고서) 우린 광고도 좀 색다르게 했어요.

어떻게요.

절대 전단을 붙이지 않았어요. 어차피 쓰레기통에 들어가거나 남한테 피해만 주는 일이니까요. 대신 음식광고 책자 같은 곳에 광고를 냈어요. 그 광고엔 꼭 음식값의 10%를 깎아주는 쿠폰을 넣었습니다.

듣고 보니까 중국집으로 성공할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가게 종업원은 몇 명입니까.

14명이에요. 매상은 하루 500만 원이에요. 연 매출만 12억 원이 됩니다.

중국집 연 매출이 12억 원이라, 대단합니다. 광주에 ‘최고루’ 체인도 많지요?

광주에만 ‘최고루’라는 상호의 중국집이 16곳이나 됩니다. 친구 녀석이 도와달라고 해서 분점을 내준 게 시작이었어요. 16개 중국집에 들어가는 재료를 한꺼번에 구매하는데요. 하루에 8톤 트럭 분의 채소가 소요됩니다.

최해식은 ‘최고의 중화요릿집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자신의 중국집 이름을 ‘최고루’로 지었다. 현재 최고루는 광주에만 16곳이 성업 중이다. 성공한 프랜차이즈인 셈이다. 최해식은 분점을 돌아다니며 경영 노하우를 전수하는 등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한편으론 어려운 이웃돕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볼품없고, 값싼 풀빵이지만, 그 풀빵은 허기진 이들에겐 구원과도 같은 것이다. 최해식은 그런 풀빵이 되고 싶다고 했다.

광주지역에서 평판이 좋으시더군요.

수익의 5%를 적립해 어려운 이웃 돕기에 쓰고 있어요. 양로원,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적립금을 쓰고 있어요. 주기적으로 어르신들 계신 곳을 찾아 짜장면도 만들어 드리고 해요. 주변에서 “국회의원으로 나가려고 그러냐고”고 농담 식으로 말하는데, 전 그런 거 없어요. 야구에서 받은 사랑을 야구를 통해 돌려 드리지 못하니까, 짜장면을 팔아 받은 사랑을 짜장면으로 돌려 드리는 것뿐이에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도 나이가 들면 은퇴를 해야 합니다. 후배들에게 은퇴 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들려주시지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저 운이 좋아서, 사람들을 잘 만나서 여기까지 온 거죠. 그런데 제가 살아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야구나 사회나 똑같더라고요. 그냥 노력만 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고, 내 분야에 최고가 되려면 그 분야를 파고 들어가야할 것 같아요. 전 그랬어요. 현역시절 공배합을 연구하듯 중국집의 메뉴를 연구했어요. 투수의 성향을 파악하듯 손님의 입맛을 파악했습니다. 하루 500번 스윙연습하듯 밤마다 몇천 번의 칼질연습을 했어요.

은퇴 후 삶이요? 전 그라운드에서 뛰던 마음가짐으로 살면 다 성공할 거라고 봐요. (빙그레 웃으며) 아따, 오늘 인터뷰가 길었네. 박 기자 시장하겄네, 내가 만든 기가 막힌 짬뽕 한 그릇 먹어볼래요?

이름 : 최해식(崔海植)
생년월일 : 1968년 9월 30일
체격 : 176cm / 82kg
이력 : 군산상고-건국대-쌍방울-해태
프로입단 : 1990년 쌍방울 1차 지명
아마 경력 : 1985년 황금사자기대회 타율왕, 한일 고교친선대회 대표팀
프로 성적 : 개인통산 682경기 출전, 타율 2할1푼7리, 375안타, 17홈런, 165타점. 도루저지율 3할4푼 / 한국시리즈 우승 경력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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