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스러운 영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융성하였다. 종(宗)과 지(枝)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거기서 출자(出自))한 바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김알지 아들 김세한)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선악(仙岳)으로부터 신령이 비로소 탄생하여 김궁전(金宮殿)에 어림하고 옥란간(玉欄干)을 대하여 처음으로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산(石紐山)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문무왕비문]기록은 신라 왕이 된 신라김씨의 선조인 김일제 후손들이 어떻게 신라로 들어왔는지를 알려준다.
[신라 기마상]=흉노족의 기마상
대구지역은 고조선 또는 예국의 후예로 보여지는 徐씨들이 기원전 2-3세기에 고조선 강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이동, 여주, 이천지역을 거쳐 土城을 남기면서 일찍이 기착한 지역이다. 이들은 달성을 쌓았으며, 대구의 옛이름 달구벌(달+기+벌= 山+城+벌)도 이 土城에 서 기인한다. 일부의 서씨들은 경주지역으로도 이동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徐羅伐이라는 경주의 옛이름에서 `나`는 나라, `벌`은 마을 또는 땅으로 풀어보면, ` 서씨의 나라`로 해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휴도왕의 큰아들 일(日, 일제)과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한나라에 잡혀갔는데 두 왕자가 무제에게 발탁되어 제천금인(祭天金人 : 흉노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황금으로 된 옹건(神像))을 뜻하는 김(金)씨 성을 하사 받았다.
『한서』「흉노전」의 주석(註釋)을 보면 제천금인은 원래 흉노의 지성소(至聖所)인 운양현 감천산 아래에 있었는데 기원전 215년, 지성소를 진시황제에게 점령당하자 그 서북쪽에 자리잡은 휴도왕의 우측 땅으로 옮겨 휴도왕이 '제천금인상'을 모셨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무제가 휴도왕이 모셨던 '제천금인'을 상기시키는 김씨 성을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에게 준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김일제가 김씨성을 하사받기 전의 성은 모(募또는牟)씨로 추정되는데, 이는 법흥왕이 김씨로 기록되기전, 관련자료에 모씨로 기록된 점과 흉노의 위대한 영웅, 冒頓(`모도루`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보임)의 이름에서 추정 가능하며, 신라의 김씨왕족은 당시 이러한 유래들을 잘 알고 있어서 기록에 모씨로 남아있고, 김일(김일제)의 후손이라고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 보아, 법흥왕이전까지는 한반도로 이주해 온 김일의 후손들이 다시 모씨성을 사용하다가 법흥왕때부터 쥐나와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다시 김씨성을 사용한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구성원전체가 흉노족은 아니다.
신라는 구성원에 있어 진시황노역을 피해 한반도로 망명해온 진한유민들(1차)+부여에서 망명해온 박혁거세세력(2차)+한족들의 보복이 두려워 망명해온 흉노족 김일제세력(3차=전한을 쿠테타로 무너뜨리고 신을 세운 흉노족.10년만에 한족들에게 전복되다)
한나라의 토벌작전에서 중국에 투항하여 말지기로 시작하여 한무제에 충성하고 투후국 왕이 된 흉노족 김일제(흉노왕 휴도의 장자) 묘가 있다. 중국왕조는 가장 충성스러운 이민족 출신으로 김일제를 내세웠다. 투후국 수도이름이 금성이다. 경주도 금성이다. 신라사관론자들이 투후국 수도가지고 신라가 중국에서 있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자신들만의 자위행위다. 김일제세력들이 한반도로 와서 신라권력을 쿠테타로 찬탈한 후에 김씨의 성(김성=금성)이라는 의미로 투후국의 수도이름을 그대로 정한 것이다.
김일제 세력이 한나라(전한)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한다. 흉노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10년만에 한족들에게 전복당하고(후한) 몰살을 피하여 한반도남부로 망명온 것이다. 스키타이 유물들이 대량출토되는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이 바로 흉노족 김씨왕족의 무덤들인 것이다. 이런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려는 넘들의 뇌구조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너무 뻔뻔한 인간들이 아닌가싶다. 스스로 조상을 부정하려는 짓거리나 다름이 없지 않는가? 흉노(소란한 종놈=중국인들의 비하적 표현)족이 중앙 아시아 초원을 지배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중앙아시아 초원문화인 알타이산의 금장식문화가 특징이라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사실이고,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무덤양식이 적석목곽분이라는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단지, 한족들에게 패하고 도망온 흉노족들이 그러한 조상들의 기상을 살리지 못하고 한반도안에 안주해서 외세에 의존하더라도 오로지 자신들만 살고 자신들만이 골목대장하려는 소아적 뇌구조와 정치노선으로 귀착해버렸다는 것이 신라 흉노족의 오만이고 반역사적 작태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신라와 백제가 원수가 된 건 진흥왕의 배신에 있다
백제성왕은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여 신라군과 가야군과 왜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일으켰다.이 연합군은 북진하여 백제군이 먼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지금의 서울)을 공격하여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여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나제 동맹관계를 배반한 채 한강 하류 유역을 탈취하고자 당시 남북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처하여 있던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553년에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하여옴으로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의 실지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매 성왕은 554년에 비전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을 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보복군에는 가야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양국의 싸움은 관산성(管山城)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싸움에서 초기에 우세를 보였던 백제는 성왕이 구천(狗川)지역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하여 4인의 좌평이 전사하고 3만에 달하는 사졸들이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 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대까지 확립되었던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 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부터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양국은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관계로 빠져버리게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 있어서 삼국의 역학 관계의 성격을 결정짓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게 되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당나라에 고구려.백제공멸을 부추긴 김춘추
당나라(미국)에 고구려(북한).백제공멸을 부추긴 김춘추(지만원)
신라 흉노족 김춘추, 당나라에 고구려.백제공멸전략을 가르쳐주다
당나라는 고구려 북부에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공격당하는 백제지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전술까지 당나라에게 알려준 자가 바로 김춘추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구려남진정책에 당황한 백제와 신라가 동맹관계를 맺었으나, 일방적으로 파기한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다. 이에 분노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백제성왕이 신라군에게 참수당하여 목이 경주궁궐에 묻어 밟히게 함으로써 백제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게 되고 신라와 죽기살기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서기 600년 왕위에 오른 백제무왕에 이르러 결정적인 성공은 아니더라도 신라의 많은 성을 빼앗고 영토를 넓혔으며, 마침내 서기 641년에 왕위에 오른 무왕의 아들 의자왕은 신라군의 최전방 사령부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대야성 전투에서 부하들의 부인들까지 겁탈했다는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었다.
우리 역사의 첫 여왕인 신라의 선덕여왕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냈으나, 자신의 땅이었던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는 신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있던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고구려의 적대국가인 당나라와 신라가 몰래 친교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연개소문이 알고 있었고 김춘추에게 고구려-백제-신라가 연합하여 당나라를 공략하여 중국땅을 분할통치하자는 제안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다[한단고기]. 김춘추는 오로지 백제와의 전투에서 죽은 자기 딸의 원한을 갚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주더라도 백제만은 멸하겠다는 소아적 발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기 648년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고구려 정벌의 실패로 시름에 잠겨있던 당 태종을 만나 백제를 먼저 정벌한 후 협력하여 고구려를 멸하자는 제안을 하여 당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는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선정을 베풀고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의자왕은 점차 자만에 빠져 ‘성충’이나 ‘흥수’와 같은 충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향락에 빠져 주변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였다.
서기 654년 왕위에 오른 김춘추 즉, 태종무열왕은 백제의 정세가 어수선함을 간파하고 당 고종을 설득하여 마침내 서기 660년 소정방이라는 장수가 이끄는 13만의 대군을 파병하게 하고 신라에서도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가담시켜 백제 정벌을 감행하였다. 당황한 백제가 초기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사이, 당군은 수도 사비로 통하는 금강 어귀에 상륙했고, 신라군 역시 요충지 탄현을 넘어섰다. 뒤늦게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 5,000명을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 해당하는 황산벌로 투입하여 병력이 열배에 달하는 신라군을 상대로 네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는 투혼을 보였으나, 화랑 관창과 같은 젊은이들이 나서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계백의 부대를 전멸시켰다. 의자왕은 태자인 효와 함께 웅진성으로 달아났으나, 사비성이 함락되고 나서 곧이어 결국 항복하게 된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여러 왕자들을 비롯하여 수십 명의 귀족과 백성 1만2,000여 명을 포로로 삼아 당나라로 끌고 갔다. 백제는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백제황족들은 백제담로이자 백제황족들의 거주지로 백제측면을 지원했던 일본열도로 망명하여 일본으로 다시 태어난다. 오늘날까지의 한일관계의 역사적 근원이 여기에 있으며, 이후 백제황족이 일본천황가로 이어지게 되었고, 일본은 백제[담로]를 기반으로 일본이 건국되었다는 창세신화를 만들고 일본(백제)중심의 역사를 기술하여 [일본서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일역사학자들의 대립과 논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중일 역사논쟁이란 한중일국가이기주의가 아니라 철저히 역사적 진실을 찾아야하는데 목적을 두고 한중일 문헌들의 비교분석과 한중일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유적유물이라는 고고학을 통한 객관적 역사논쟁이어야 한다.
한일관계의 원인제공자 신라 흉노족
옛 가야 시대 때 이미 일본 시마네 현 쪽으로 건너가서 살고 있었던 “석탈해”(일본 시마네 현 출생) 가 신라의 2대왕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유리왕 다음으로 왕이 되었다. 이때는 일본 이 모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땅이었다.
한편 신라는 박. 석. 김 씨로 돌아가면서 임금을 맡아서 하다가 16대 흘해왕 때, 김 나물 왕이 혁명을 일으켜서 왕권을 쥐게 되었고, 석 흘해왕과 아들도 죽임을 당하고 손자 중 하나가 겨우 살아서 일본 시마네 현 이즈모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서부터 한-일 관계가 근본적으로 꼬이기 시작하였다고 나는 본다.
그때부터 신라에 원한을 품은 석씨일족 들의 일본 내에서의 활동은, 신라의 왕이었던 고귀한 신분을 앞세워, 일본 정부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니 자연이 권한이 많아지고 권력을 휘두르고 천황까지도 꿈을 꾸었던, 석씨왕족인 소가일족(蘇家一族)의 300년 영화는, 국무대신 겸 재무장관 직책까지 맡아서, 새 천황들을 옹립 할 때마다 깊숙이 관여 하였고,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못살게 굴며 석 씨 왕권 회복과 신라 왕권 전복의 기회를 노리며 무척 노력하였다.(우리조상이 세운 일본 나라 : 박병식 저 참조)
신라가 반도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문무왕 2년 서기662년 에 석씨왕족의 재산(본피궁)을 몰수하여, 반은 국고에 넣고, 나머지를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누어 준 사실이 있었다. 이는 신라가, 왕좌에서 쫓겨난 석씨왕족이, 백제와 손을 잡고 250년 동안이나 신라를 괴롭혔던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서기 681년 7월 신라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자리에서, 자기 시신을 동해 입구에 있는 대석상에 장사 지내라고 유언하였다. 감은사(感恩寺)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바다의 용이 되어 왜군을 막겠다고 되어 있다 한다. 문무왕의 이러한 유언을 해야 할 이유는, 바로 그의 손으로 모진 박해를 한, 석씨왕족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깨달아야 한다.
조선왕조 선조25년 1592년 임진왜란이 6년간 계속되어 1598년 끝날 때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이 끈질기게 계속 되었으며, 그 후 일본의 국력이 강해 질 때면 꼭 침략의 본성을 드러내곤 하였다. 또 한 일제 강점기 35년은 대한제국을 철저하게 짓밟고 괴롭힌 현대사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옛 가야를 흡수한 신라를 미워하고 “님의 나라 (임나: 가야)”를 잃었다는 슬픔과 석씨 왕조의 원한에 찬 보복 이 겹친 업보가 아닐까? 심히 마음이 무거워 짐을 느낀다.
minjock1944@hanafos.com
*필자/한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강동민
신라 흉노족은 누구인가?
-경주.김해 김씨의 족보 -
"신령스러운 영원(靈源, 김대성은 '신령스런 근원'으로 해석하기보다 투후가 된 김일제가 받은 땅이라고 해석)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융성하였다.
종(宗)과 지(枝)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거기서 출자(出自)한 바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 김알지)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선악(仙岳)으로부터 신령이 비로소 탄생하여 김궁전(金宮殿)에 어림하고 옥란간(玉欄干)을 대하여 처음으로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산(石紐山)을 보는 것 같았다."
이 [문무왕비문]기록은 신라 왕이 된 신라김씨의 선조인 김알지가 어떻게 신라로 들어왔는지를 알려준다.
기원전 122년 한무제(漢武帝) 때에 곽거병은 감숙(甘肅)지방에 있던 흉노를 공격했다.
흉노의 계속되는 패전에 당시의 이치선우는 그 책임을 물어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을 죽이려 했다. 이에 두 왕은 이치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한(漢)나라에 항복하려 했는데, 도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였다.
휴도왕의 큰아들 일(日, 일제)과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한나라에 잡혀갔는데 두 왕자가 무제에게 발탁되어 제천금인(祭天金人 : 흉노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황금으로 된 옹건(神像))을 뜻하는 김(金)씨 성을 하사 받았다.
『한서』「흉노전」의 주석(註釋)을 보면 제천금인은 원래 흉노의 지성소(至聖所)인 운양현 감천산 아래에 있었는데 기원전 215년, 지성소를 진시황제에게 점령당하자 그 서북쪽에 자리잡은 휴도왕의 우측 땅으로 옮겨 휴도왕이 '제천금인상'을 모셨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무제가 휴도왕이 모셨던 '제천금인'을 상기시키는 김씨 성을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에게 준 것은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런데 김일제의 후손인 김알지의 경우 원래 김은 금(Gold)을 뜻하는데 이름인 알지(閼智)도 몽골-투르크어계에서 금을 의미한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으로 김알지는 금 금(Gold Gold)을 뜻한다. 김씨왕계가 수도를 금성(金城)이라고 한 것도 북방기마민족이라면 연상되는 제천금인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주채혁 박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아시아 북방민족들의 경우에 징기스칸의 혈족을 일컫는 Altan(황금) Urug(씨족)처럼 '김씨(金氏)'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임금씨족 곧 천손족(天孫族)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라고 설명했다. 후금(後金)인 만주제국의 황족을 애신(愛新, 황금) 각라(覺羅, 겨레)라 부른 것과도 다름아니라는 뜻이다.
그 후 일제는 무제의 경호를 맡을 만큼 신임을 받던 중 무제의 침실에 숨어들어 온 자객과 현장에서 격투를 벌려 체포함으로써 더욱 더 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한무제는 자신의 딸을 김일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려 했으나 김일제는 이를 사양했다. 한무제는 임종시에 어린 소제(昭帝)를 보필하라는 유촉을 그에게 내렸다.
『한서』에 그 당시의 일이 적혀 있다.
『무제가 죽기 전 김일제를 포로로 했던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김일제를 불렀다. 곽광이 물었다. “만약 폐하께서 세상을 버리시게 된다면 누가 후사가 되겠습니까?” “그대가 앞서 받은 그림의 뜻을 모른단 말인가.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주공(周公)의 일을 하라” 이에 곽광은 자신이 김일제 보다 못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양했다. 김일제 또한 자신이 외국인이며 곽광보다 못하다고 말하자 무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 김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겼으며 다시 김일제를 제후국의 왕인 투후로 봉했다.』

山東 흥평현에 있는 김일제 묘비(묘는 섬서성에 漢武帝 릉과 배장되었다 한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대대로 후(秺候, 투후)를 계승했다. 김일제는 사망한 후 무제의 능인 무릉(茂陵)의 공신으로배장(陪葬)되었는데 그의 묘는 현재 서안에서 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섬서성 홍평현 남위향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그러나 김일제의 후손은 왕망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新, 8∼23)을 건설하는 와중에 대격변을 겪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되며 김일제의 동생인 윤(倫)의 5대손 탕(湯)이 가야로 들어와 김씨 시조인 김수로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휴도국의 왕자인 김일제와 김윤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로 들어오게 된 배경은 신(新)을 건설한 왕망(王莽)이 김일제의 증손자 당(當)의 이모부였기 때문이다.
문정창 선생의 주장에 의하면 왕망은 한나라 공신인 김일제의 가문에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3년 전, 아버지의 이복 동생인 왕씨(王氏)가 한(漢)나라의 왕비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성씨를 김씨에서 왕씨로 개명하여 한나라의 권력 심장부에 들어 갈 수 있었다.
한나라의 왕비가 된 이모인 왕씨 그녀는 남편 원제(元帝)가 사망하자 황후가 되었고, 이로 인해 그녀 자신과 그녀의 문벌은 더 큰 권위와 영향력을 갖게되었다. 왕황후의 아들이며, 왕망의 사촌이 되는 한나라 황제 성제(成帝)는 인품이 좋았으나 유약하고 무책임하여 정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외척 가운데 4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섭정으로 임명했고, 이들 가운데 마지막 섭정을 지낸 사람이 BC 8년에 은퇴했다.
이 기간 동안 왕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후원자가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관직운은 불투명했다. BC 22년 그는 궁중에서 비교적 낮은 지위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BC 16년 큰아버지 봉(鳳)의 추천으로 신도공(新都公)이라는 귀족작위를 받았다. BC 8년 11월 28일 마침 비어 있던 섭정직에 임명되어 정치적으로 좋은 기회가 다가오는 듯했으나, BC 6년(또는 BC 7)
성제의 조카인 애제(哀帝)가 등극하여 정치적 상황이 일변했다.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을 건설할 때 북방기마민족의 천손임을 자부하는 김씨 일가가 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한서』〈왕망전〉에도 나와있다. 그런데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혁신적인 개혁조치를 추진하다가 단 15년 만에 후한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게 멸망한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는 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김일제의 후손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래 북방기마민족인 김일제의 후손들은 일부는 한반도로 다른 일부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로 또다른 일부는 자신의 원래 본거지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망명하여 성을 왕(王)씨로 바꾸고 살았으며 또 일부는 서방으로 진출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김씨의 내력을 적은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는 신라김씨가 북방기마민족 즉 天孫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왕망 시대의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많이 출토되는 것도 이들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출처] 왕망은 김일제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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