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시황
때늦은 연애편지- 로미오 이즈 블리딩
사랑을 표현하는, 혹은 정의하는 무수한 말들이 있다. 시인이 아니라도 사랑으로 애틋한 가슴앓이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중에서도 남자들의 사람 덜됨을 잘 표현해주는 속된 말이 있어 적어보면,
"여자의 사랑은 만날 때 시작되고, 남자의 사랑은 떠나 보낸 뒤 비로소 시작된다"
이 말이 때늦은 후회가 되어 가슴을 때려본 적이 있으리라. 남자의 그칠 줄 모르는 소유욕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주자고 넉넉
하게 헤아려준다 하더라도, 남자들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해 혹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증이 대단한 존재들이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그 욕구가 더 강하면 강했지 일반적인 남자들에 비해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시인하는 것이
옳으리라). 이솝 우화를 보면 이런 무모한 욕심으로 인해 원래 자신의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여우의 이야기가 있다. 먹음직
스러운 고깃덩이를 물고 집으로 돌아가던 여우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다리 밑에 웬 여우 한 마리가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입
에 물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여우는 저 놈이 물고 있는 고깃덩이가 크니 그걸 빼앗아야겠다는 생각에
캥캥거리고 짖었다. 그 바람에 자신이 입에 물고 있던 고깃덩이가 풍덩 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냇물에 빠져버렸다는 이야기이다.
내 생각엔 이 여우가 아마도 수컷이었음에 틀림없다. 암컷이라면 굴 속에서 자신을 기다릴 어린 새끼들을 생각해서라도 집으로
잽싸게 돌아가 버렸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 우화에 등장하는 여우가 수컷인지 암컷인지 이솝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구태여
여기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여자라고 욕심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영화에 관심 있어 하는 이들에게 종종 이 영화 <로미오 이즈 블리딩>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생각
보다 많지 않았다. 막상 본 사람들조차 무슨 이야기인지 잘 기억하지 못해서, 아니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해서 나
를 속상하게 만들곤 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영화의 주인공 '잭 그리말디(Jack Grimaldi)'에게 강한 자기 동일시를 느낀
탓일 것이다. 나는 그런 반응을 겪을 때마다 마치 내가, 나의 은밀한 속내가, 아니면 나의 그런 약점, 아픈 점들을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무시당해 버린 느낌을 받을 만큼 아팠다. 세상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그 안엔 숱하게많은 캐
릭터(character)들이 등장한다.
캐릭터란 말 안에는 이미 작의(作意)적이란 의미가 숨어 있다. 그것은 작품 내용에 의하여 독특한 개성과 이미지가 부여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격(personality)이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그가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우리들로 하여금 예상 가능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인격이란 것 여러 성격, 여러 행동의 전체적인 모습들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누군
가와 친분을 쌓고 알아간다는 것은 타인의 인격을 습득하고, 이에 대해 예상하고 포용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인정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강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이라고 할 수 있다. 스테레오 타입을 흔히 전형
(典型, type)과 구분치 않고 사용하는데, 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형이라는 것은 어떤 사항에 대해 기준이 될 만
한 형식이나 그런 형식을 갖춘 대상을 의미하지만, 스테레오 타입이란 뚜렷한 근거 없이 감정적 판단에 의한 일종의 고정관념
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앞서도 이미 말했지만 우리는 인격 속에 누구나 일종의 캐릭터성, 스테레오 타입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런 스테레오 타입에
의존하여 일상생활의 모든 사물, 사건을 지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스테레오 타입 체계는 나라는 한 인격의 틀을 지켜주는 일종
의 자아방위 메커니즘이자, 아이덴티티(identitiy)의 핵심을 이룬다. 그 자체로 자신의 인격을 지켜주는 틀이 되기 때문에 때로
인간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어떤 스테레오 타입이 스스로에게 불리한 것, 불합리한 것이라고 판단되더라도 자아의 질서와 조화
를 이루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해 버리는 것으로 현실을 왜곡시켜 받아들인다. 우리가 흔히 개성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때로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지 못하고 거부당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반도덕적·반사회적이라는 낙인 속에 가두고 싶지 않기 때문
에 스스로에게 제재를 가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들을 스테레오 타입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이에 대한 스스로에게는 순종
을, 타인에게는 동조를 보낸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개성을 숨기고, 스스로에게 징벌을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예술 작품 속 캐릭터에 감동하고 동조하는 까닭 중 일부는 내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자아가 그 캐릭터에 함께 공명(共鳴)하며 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소설 속에서 이건 정말 내 얘기야 라고 느낄 만한 스토리나 캐릭터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로미오 이즈 블리딩>을 보는 내내 극중의 '잭 그리말디(Gary Oldman)'를 바라보면서 거울을 마주 보고 있
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잭 그리말디는 사랑이 자기 곁을 떠났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랑의 소중함을 깨우친다. 그런 의미에서 잭
그리말디가 증인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홀로 도망쳐 통곡하는 황폐한 사막은 영화 <길 (La Strada)>의 잔 파노가 통곡하는 해변
과 동일한 시공간이다. 그것은 때늦은 후회와 사랑에 뒤늦게 눈뜬 남자가 보내는 시효가 만료된 연애편지이다.
아내와 정부(情婦), 그리고 팜므 파탈 (Femme Fatale)
로미오 이즈 블리딩>에는 성숙한 남자가 인생행로에서 마주 칠 수 있는 세 가지 부류의 여성이 나온다. 그것은 아내와 정부
그리고 팜므 파탈이다. (여러분들은 이 글을 읽으며 이건 평소의 바람구두와는 좀 다른 데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잭 그리말디'일 테니까) 남자들이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자신의 심중
을 위장하더라도, 남자들에게 여자는 둘 중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아니면 '창녀'의 이미
지이다. 여자 친구도, 아내도, 동료도 그 이외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주변의 모든 여성이 남자의 뇌리에 어떻게
정리되는가? 그것이 물론 단지 두 가지 인덱스 목록으로 정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정말 그렇게 두 가지 만으로 분류
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엄청난 지진아가 아니라면 카사노바일 테니까. 남자들은 그 두 가지의 비율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여성들을 분류하겠지만 그 구분 근거가 위와 같다는 뜻이다. 혹시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거나
내 남편은 안 그렇다, 내 남자 친구는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시도록 하라. '최소한 나는 그렇
다'로 편하게 정리하면 된다. <로미오 이즈 블리딩>에서 '로미오'는 '불같은 사랑에 빠진 남자, 열렬한 애인'을 의미하는 말이다.
당연히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 로미오가 어원이 되었음직한데, 블리딩은 '피 흘리는'이라는 뜻이니까 이 제목
을 의역하자면 '불 같은 사랑에 배신당하고 피 흘리는 로미오' 정도가 될 것이다. 영화 속 잭 그리말디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이
될 것이다. 잭은 뉴욕 시경에서 조직 범죄를 담당하는 강력계 형사다. 적과 오랫동안 싸우다보면 그 적을 닮아간다고 하던가?
그에게 정의감이나 대의 명분 같은 것은 찾아 볼 수도 없으며, 그가 열정을 쏟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돈과 섹스 뿐이다. 그에게는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는 아내 나타샤(애나벨라 시오라)가 있음에도 그는 정부 쉐리(줄리엣 루이스)를 비롯해
서 다른 여자들과의 정사를 끊임없이 꿈꾼다. 그러나 극중에서 잭은 오히려 임포텐스에서 가깝다. 그는 정부 쉐리와의 정사도
말만 앞설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잭의 진정한 사랑은 돈이라고 해야 한다. 그는 빨리 한 건 올려서 지긋지긋한 경찰을 그만
두는 게 소원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식으로 표현하자면, 자본주의 하에서 직업이란 더 이상 유희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잭의
유일한 즐거움은 비밀리에 조직범죄단에 정보를 흘리고, 그 대가로 받은 돈을 뒷마당에 있는 맨홀 속에 숨겨둘 때 뿐이다.
탄탄한 연기력이 뒷받침된 스토리
이 영화 <로미오 이즈 블리딩>은 전형적인 범죄 느와르물이다. 타락한 경찰과 조직범죄단의 두목이 나오고, 팜므 파탈이
나온다는 점이 그렇고, 그 스토리 역시 정석대로 진행된다. 장르 영화의 장점은 스토리텔링의 방식이 관객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되도록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전형이란 것은 너무 정석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오히려 식상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
다는 약점을 지니게 된다. <로미오 이즈 블리딩>은 그런 약점을 배우들의 연기로 극복해내고 있다. 이 영화에 주연으로 등장
하고 있는게리 올드만은 워낙 연기파 배우로 성가를 올리고 있으므로 제외하고라도, 잭의 부인역을 맡고 있는 애나벨라 시오
라의 연기는 정말 날 울리고 말았다. 그녀가 풍기는 매력은 정말 묘한 데가 있어서, 서서히 중년에 접어들고 있는 부부의 나른
함과 포근함 그리고 익숙함에서 풍겨나오는 편안함과 더불어 다가오는 위기를 몇 마디 없는 대사로도 충분히 전달해준다.
게다가 잭이 <길>에서의 '잔 파노'라고 한다면 그녀는 '젤소미나'의 경우에 해당할 텐데,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잭이 마지막
장면에서 울부짖는 장면이 그토록 호소력 있게 다가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 덕분에 나는 애나벨라 시오라의 슬
프고 힘없는 미소를 나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저장하게 되었다.
<로미오 이즈 블리딩>은 그간 범죄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팜므 파탈을 합쳐놓은 것보다도 위력적인 강력한 팜므 파탈이 등장
하고 있다. 지금까지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대개 미모가 떨어지면 머리가 아주 좋거나, 아니면 미모와 삐뚤어진 성격을 겸비한
그런 이미지였다. 물론 팜므 파탈이란 것이 미모의 유무와 관계없이 지혜로써 남자를 파괴시킨다는,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품
고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의 일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인데 극 중의 모나 드마르코로 등장하고 있는 레나 올린은 그야말로 남성
을 압도하는 '이빨 달린 바기나(vagina)'의 생생한 화신처럼 보인다. 그녀를 단순히 팜므 파탈이라고 하지 않고 '강력한'이란
수식을 덧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녀는 자신의 팔 한쪽을 잘라내고도 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아마존의 이미지까지 새겨져
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사실 밀란 쿤데라 원작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에로틱한 표현에 일가견이 있는 필립 카우
프만 감독이 영화화한 동명의 영화에도 잘 표현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란 제목으로 개봉됨) 그녀는 이 영화
에서 자유분방한 성격의 사비나를 연기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 남들이 모두 <가위손>의 위노나 라이더나 <스플래쉬>의 대릴 한나에 빠져 있을 때 나를 잠 못 들게 한 '줄리엣 루이스'가
있다. (진짜로 못 잤다는 말은 아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줄리엣 루이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조니 뎁과 함께 출연한 영
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통해서였지만, 그녀의 연기력과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확인하게 된 것은 올리버 스톤 감독의<내추럴 본
킬러>(1994)였다. 줄리엣 루이스는 1991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케이프 피어>로 주목받는 배우가 되어 이후 1993년 한 해
동안 <길버트 그레이프>, <로미오 이즈 블리딩>, <캘리포니아> 등 3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이후에도 줄리엣 루이스가 출연하는
영화는 확실히 그녀만의 느낌표를 찍을 수 있는 것들이다. <로미오 이즈 블리딩>에서는 모나의 함정에 빠진 잭의 손에 어이없이
죽어야 하는 잭의 철부지 정부로 등장하고 있다(최근작들에서는 오히려 줄리엣의 매력이 반감되고 있다). 그 외에도 스티븐 스
필버그 감독의 <조스>와 <마라톤맨> 등 수많은영화에 출연한 로이 샤이더가 조직범죄단의 두목 돈 팔콘(이탈리아계 갱인 만큼
'팔콘'이 아니라 '팔코네'가 맞겠지만)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소 이색적인 건 이 영화에 론 펄만(Ron Perlman)이 잭의 법정대리
인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건감독 피터 메닥과 과거에 TV시리즈 <미녀와 야수>에서 맺은 인연 때문일지도 모르
겠다 (이때 미녀는 <터미네이터>의 린다해밀턴이 맡았고, 당연한 말이지만 야수는 론 펄만이 맡았었다).
<로미오 이즈 블리딩> : 멜로 영화의 느와르(Noir) 버전인가?
개봉 당시 영국의 진보적인 저널인 <가디언>지의 평가 ("쟁쟁한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누아르풍의 조명, 재즈선율에 액션이
버무려진 어두운 객석에서 스크린에 코를 박고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락 영화”)나, IMDB의 영화평도 그렇고,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영화는 실제로도 느와르 영화의 전형적인 규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이 영화는 느와르 영화의 규
칙을 탈피하고 있다. 이것은 이 영화가 사랑에 대해 주목할 만한 시선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느와르 영화가 여성에
대해 던지는 시선이 악녀나 보호받을 대상 혹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데 반해서 이 영화는 잭 그리말디의 매력적인 1인칭 독백
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게다가 영화의 첫 장면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같은 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영화 <길>이나 <파이란>의 구도와 흡사하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느와르의 장르적 속성에 이 영화가 1인칭 화자의
사랑 이야기를 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못난 남자가 사랑을 잃는 원인은 매우 느와르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다. 우리 시대의 이 불쌍한 로미오는 셰익스
피어 시대의 고전적이고 순결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내가 되었다. 잭 그리말디는 조직 범죄단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범죄 집
단과 이들과 연관된 특수계층의 쾌락에 젖은 은밀한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이 일이자 곧 취미다. 그는 이들의 사생활을 훔쳐보면
서 자기도 한 건 해서 언젠가는 저런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열등의식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정부 셰리에게 자신이 훔쳐 본 부
자들의 타락한 몸짓을 흉내내도록 시키지만 그것은 다만 흉내일 뿐 그의 부족한 허기를 달래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경관으
로서의 명예 같은 것은 어느 순간엔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아내와의 기념일 같은 것은 그저 의식의 일환일 뿐이었다. 잭은 수사
기밀을 범죄조직에 팔아넘긴 대가로 챙긴 돈을 지하 맨홀에 숨기는 그 순간에만 삶의 환희(오르가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잭 은 갱단의 거물 돈 팰콘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줄 테니 한때 그의 부하였다가 팰콘에게 불리한 증언을
대가로 사면을 약속받은 조직원이 은닉된 안가에 대한 정보를 넘겨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잭은 거액의 유혹에 맥없이 무너지고,
위험한 줄 알면서도 안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가 넘긴 정보 덕분에 팰콘은 자신의 정부이자 조직의 2인자이기도 했던 모나를 보내 안가를 급습할 수 있었다. 유능하고 잔인
무도한 킬러이기도 한 모나는 증언자는 물론 그를 보호하고 있던 잭의 동료 경관들마저 무참히 살해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바
로 잔인무도하기 그지 없어 '흡혈귀'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모나 드마르코'가 체포된 것이다. 잭은 팰콘에게 모나를 직접 제거하
라는 협박을 받는다. 만약 그가 이를 거부할 때는 그간 자신에게 협조한 내용을 모두 감찰반에 알리겠다는 것이다. 팰콘의 협박에
못이긴 잭은 모나를 제거하기 위해 안가로 향하게 되지만, 오히려 모나의 섹스 어필하는 유혹과 팰콘을 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다면 두 배의 보수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미(美)는 때로 경배와 관용의 대상으로, 때로는
치명적인 유혹이자 죄악으로 작용한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찬미의 대상이며 동시에 경계의 대상인 것이다. 여성에게는 늘'어머니'라는 성녀의 이미지와 동시에 '창녀'
일 수밖에 없는 악녀의 이미지가 덧칠돼 있다. 성적으로 매력없는 여성은 늘 비웃음의 대상이며, 여성은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잭 그리말디가 꿈꾼 것은 자본주의가 베풀어주는 풍요로운 허상이다. 누
구나 도달할 수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무도 도달할 수없는 공간. 그리고 그 풍요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영화에서처럼 부패와 타락,
권력과의 야합,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서만 가능하다. 물론 내가 잭 그리말디의 불운한 인생에 대해서 그와 똑같은
회한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내 안에 드리워진 깊은 우울의 한 자락을 발견한다.
여성을 가르는 이중 잣대 - 어머니와 창녀
<로미오 이즈 블리딩>은 남성을 압도하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여성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키고 있다. 모나 드마르코
의 별명이 '흡혈귀'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그녀는 뛰어난 킬러이자 조직의 2인자이지만, 동시에 조직의 No.1인 보스의 정부
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과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만들어 냈던 전국시대 월나라 출신의 절세가인
서시(西施)는 범려의 미인계로 이용당해 오왕 부차를 그릇된 정치의 길로 인도한다. 훗날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나라 왕 구천은
서시의 공로가 제일 크니 그녀를 불러 후한 상급을 내리겠다며 그녀를 서둘러 자신의 앞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하지만 범려는
그녀가 남자라면 혹여 모르겠으나 여자이므로 후한 상급이란 결국 구천의 후궁이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월나라의 앞날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니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모나는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거당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모나는 잭의 정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죽음으로 위장한다. 그녀는 팰콘을 생매장하는 것으로 모자라 잭의 일상
도 모조리 파괴하고 만다. 이제 부패경찰 잭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성인 남성들을 위한 공포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80년대 유행했던 공포영화에 내재된 정치적 의미가 성적
으로 방탕한 10대 청소년들에 대한 교훈이었다면, 이 영화는 외도를 꿈꾼 남자들에 대한 징벌이자 공포> 이면서 동시에 "가정에
충실하라"는 교훈이다. 모나는 조직의 2인자로서 조직의 보스 자리를 노리는 존재다. 그녀는 가부장적 질서가 통치하는 사회와
조직에서 남성 고유의 권위에 도전하는 위협적인 존재인 것이다. 가부장적 통치 질서 안에서 여성의 순결은 종종 가문의 재산으
로 평가받고, 순결을 잃은 여성은 부도덕한 여성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욕을 정당
하게 드러내는 여자에게는 사회적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때로 이런 억압은 옷을 야하게 입고 다니거나, 밤늦게 돌아다니는 여자
는 모두 부도덕한 여자라는 이름으로 징벌의 대상이 된다. 바로 얼마전에도 자신의 가정이 파탄난 한 남자가 그런 이유로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모나'라는 이름은 '마돈나', 즉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로 여자를 높이는 말이기도 하다. 흡혈귀란 별명을 가진 성모 마리아가 이끄
는 세계가 있다면, 이는 곧 지옥일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최고 매력은 역시 모나 드마르코의 파괴력에 있다고 생각된다. 모나의
엄청난 파괴력 앞에서 잭 그리말디는 벌벌 떨고, 발가락을 다쳐서 쩔쩔맨다. 탈출을 위해 자신의 한쪽 팔마저 잘라내고 너무나
당당한 여인. 모나 앞에서 잭은 얼마나 왜소해 보이는가? 그러나 모나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사라져줘야 한다. 세상에는 흡혈귀
란 별명을 지닌 성모 마리아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의 갈림길에 선 드라큘라의 최후가 심장에 말뚝을 받는 것이듯
모나는 법정이 파한 뒤 빠져나오는 로비에서 잭의 총격으로 숨지고, 잭은 자신이 바로 조직의 범죄에 대한 증인이 되어 증인보호
프로그램의 대상이 된다. 이제 잭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모나의 위협 속에서 떠나보낸 자신의 아내 나타샤를 다시 만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도 그에게 남은 유일한 사랑. 나타샤는 나타나질 않는다. 다만 외롭게 홀로 남겨진 집의
문짝이 바람에 헐거워져 그 틈새를 내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경찰 잭 그리말디가 이해되는 건
영화가 끝나면서 첫 장면의 삐걱거리는 문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잭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까지 그를 믿고 사랑해준 순결한 아내에 대한 애틋한 경배 뿐인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그림자를 등지지 않고는 빛과
대면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잭의 모습은 J.R.R.톨킨의 소설『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캐릭터 '골룸'의 모습과 닮아
있다. 잭이 사랑을 잃은 것은 돈이 풍기는 어둡고 습기찬 '자본의 절대반지'에 매료되면서 부터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말이
다. 그의 사랑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자본주의적 인간이 되어 처음 경찰이 될 때의 순수한 마음, 아내 나타샤와의 사
진첩에 정리되어 있는 사랑의 애틋한 마음이 훼손되면서부터였다. 나는 황인숙의 아래 시를 읽으며 잠시 그런 마음을 되
짚어 보았다.
나를 믿지 마세요 / 황인숙
믿지 마세요
당신이 믿음을 저버리고, 들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을
절대로
마음을 놓지 마세요.
하느님도 그를 달래실 수 없어요
까칠한 얼굴을
절벅거리며 씻다가
(우리에게는 바빌론강도 없으니까)
수돗물을 틀어놓고
수돗가에 앉아서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내 말을 알 거에요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등을 돌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이 누구인가를. 잭 그리말디가 꿈꾼 것은
자본주의가 베풀어주는 풍요로운 허상이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공간. 그리고 그 풍
요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영화에서처럼 부패와 타락, 권력과의 야합,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서만 가능하다. 물론
내가잭 그리말디의 불운한 인생에 대해서 그와 똑같은 회한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내 안에 드리
워진 깊은 우울의 한 자락을 발견한다. 그것은 역시 '너도 한때 그와 같은 꿈을 꾸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권력과
부, 쾌락과 명예를 거머쥔 인생이다.
그러나 내가 진정 공감하는 것은 잭이 그의 아내 나타샤가 지탱해주는 삶의 안온한 공간이 현실 속에서 가능했던 이유를 뒤늦
게 발견한 깨달음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현실에서 그토록 평온하고 아늑한, 그럼으로 진부하고 지루하여 때로 탈출
하고자 하는 그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감옥에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유폐시킨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할렘을 꿈꾸는 동안, 가정은 여성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감옥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여성이 사랑을 포기하
는 순간, 더 이상 남성 세계에 구원이란 없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유폐시킨 여성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있는 존재는 남성들 이외엔 없다.
지구라는 둥근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는 여성을 감옥에 가두어 둔 채로, 남성들 역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자본주의의
음습한 냉기가 뿜어내는 마력에 중독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내 인생에서 진정 의미있는 순간은 단지
다음 두 순간 뿐이다. 하나는 사랑할 때, 그리고 다른 한 순간은 그 사랑이 내 곁을 떠났을 때. 당신이 사랑의 순수함을 잃어 버
렸을 때, 사랑은 그저 헐거워진 문짝의 공허한 '삐걱거림'일 뿐이다. 내가 이 영화에 그토록 매료된 이유란 바로 그 '삐걱거림'
의 존재를 알기 때문이다.
* 어제 올려드린 <주식 투자와 사랑 이야기> 하단부 링크를 누르기 귀찮아... 그냥 지나치신 분들을 위해 친절히
내용을 소개함미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성미라서 씨잘데 없는 짓거리도 많이 하지만...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나면 얻는 것이 있을 거라는 소망 하나로... 혈액형 O형 답지 않게 소심하고 계집애같다는 평을 어릴적부터
들어온 저로서는 오랜 세월 산전수전 풍파를 겪으며... 많이도 변해버렸나 봄미다... 잠시나마 자성의 의미에서
무료 전문가 방송
최근 방문 게시판
실시간 베스트글
베스트 댓글
0/1000 by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