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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펌) 트레이더 생존법칙코멘트3

국내 파생상품시장이 각종 규제 강화로 고사 위기다. 정부가 개인 투자자들의 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옵션 승수 인상, 옵션 매수 전용계좌 폐지, 양도소득세 부과 등을 잇달아 추진하며 선물·옵션 거래량이 급감하고 있다. 한때 수백억을 벌며 증권사의 ‘큰손’으로 자리 잡던 선물·옵션 트레이더들도 대거 퇴출됐다. 최근 KB투자증권, KTB투자증권, 한맥투자증권 등 수백억원대의 파생상품 주문 사고가 거듭 터지며 트레이더에 대한 증권사의 시선도 곱지 않다. 거의 모든 트레이더들은 1년 계약직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여전히 자신만의 독보적인 매매원칙으로 선물·옵션 시장에서 살아남은 트레이더들도 적지 않다. 장중에는 화장실도 참고 0.0001초만에 머리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일상을 반복하며 연간 수억원을 벌어들이고 있다. 좁은 여의도 트레이더 업계에서 ‘귀신’으로 통하는 그들을 직접 만났다. [편집자주]

“밤에는 1시간마다 깨서 장을 확인합니다. 잠을 쪼개서 자다 보니 한 10~20번은 깨는 것 같아요. 꿈에서도 트레이딩을 합니다. 문제가 안 풀려서 화가 나서 잠이 들었다가도 꿈속에서도 문제를 풉니다. 그러다 벌떡 깨는 적이 많죠.”

 NH농협증권 손우현 차장 /성형주 기자

여의도 NH농협증권에서 만난 손우현 차장(42)은 피곤한 안색에도 웃음이 넘쳤다. 늘 잠이 부족하고 시간을 쪼개 쓴다는 그이지만 열정이 넘쳤다. 손 차장은 “내가 원래 굉장히 동안이었는데, 트레이딩을 7~8년 하다 보니 엄청 삭았다”면서 “몸을 집중해야 하고 화장실도 참았다가 뛰어가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허허 웃었다. 그는 “건강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트레이딩을 계속하려면 거액의 인센티브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면서 “친구도 못 만나서 친구도 점점 없어진다”고 토로했다. 

손 차장은 연세대 수학과 92학번으로 경제학을 복수전공했다. 원래 트레이더에 관심은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돈’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넉넉한 집에서 자란 것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초등학교 때 꿈이 은행지점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는 대학 졸업 후 증권사와 은행 등에 이력서를 넣었고 2000년에 최종 교보증권에 합격, 지점 생활을 시작했다.

“신입직원은 모두 지점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저도 지점에서 6개월 정도 근무하고 나서 기획실 리스크 관리 파트로 옮겼습니다. 근데 그때 트레이딩 부서는 퇴근도 일찍 하는데, 받아가는 성과급은 상당해서 부러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저도 파생상품 운용팀에 가고 싶다고 계속 건의했죠. 그러다 운용은 아니고 파생상품 영업부로 옮기게 됐습니다. ”

손 차장은 은행과 투신사 등의 기관으로부터 코스피 선물·옵션 주문을 받는 법인 영업부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자체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는 매매 시스템을 개발, 기관에 제공하는 식이었다. 그는 “평소 밤 10~11시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것은 기본이었고 매니저와 저녁 식사 후 12시에도 들어와도 새벽 3시까지 연구하고 그랬다”면서 “정말 간절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NH농협증권 손우현 차장 /성형주 기자

하지만 당시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수익률 자체는 괜찮았지만 절대 수익 자체가 크지 않아 투자자들의 호응이 별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모아뒀던 종자돈으로 매매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내가 결혼 전에 모아놓은 5000만원이 있었다. 손 차장은 “그 자금으로 한 달에 1~2% 정도씩 연수익 15~20%를 목표로 하는 시스템을 아내 몰래 개인적으로 운용했다”면서 “옵션 매도 플레이 위주로 데이트레이딩을, 하루에 한 번 이하로만 매매하는 보수적인 전략을 취했다”고 설명했다. 처음 두 달은 예상대로 수익을 얻는 듯했다. 

“12월의 선물옵션 만기일이었죠. 당시 코스피지수가 강보합으로 출발하고 나서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슨 자신감인지 지수 하락을 확신하고 5000만원 전부를 기초가격과 행사가격이 일치하는 ATM(등가격) 가격의 풋을 매수했죠.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실제로 지수가 갑자기 쭉쭉 밀리더니 11시쯤에는 잔고가 9000만원으로 이상으로 올라왔습니다. 1억원 이상으로 잔고가 올라가면 정리하려고 했죠. 그러다 점심때에 자장면이 배달됐고 팀 막내였던 저는 5분 만에 식사 세팅을 마치고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수가 처음 하락폭의 반 정도 반등해 본전이 됐더라고요. 다시 5분 만에 자장면을 먹고 돌아와 보니 이제는 마이너스 500만원까지 내려갔습니다. 다시 심기일전 한 후 2시쯤부터 베팅해 운 좋게 플러스 500만원으로 장을 마쳤습니다.”

그는 당시 이렇게 방향성 매매 방식을 반복하며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종자돈 베팅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깡통계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여기저기 대출도 받다 보니 추가로 빚만 1억원을 떠안았다. 매월 나가는 이자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결국 아내한테 모든 사실을 털어놨고 아내도 크게 힘들어했다”면서 “하지만 다행히도 속 깊은 아내가 모든 것을 덮어줬다”고 미소를 띄었다.

이후 손 차장은 스스로 지점 발령을 지원했다. 자신이 개발한 옵션 시스템 매매 전략에 맞는 투자자들 직접 찾아나서기 위해 압구정 지점을 택했다. 하지만 압구정 지점은 그의 예상과 달리 소위 ‘부자’들이 없었다. 돈이 있어도 대부분 휴면 계좌가 많았다. 그는 “그때부터 나의 매매 전략과 약력, 비전 등을 담은 안내장를 만들어 투자자들에게 우편을 보내고 일일이 전화를 했다”면서 “그래도 3개월 연속 약정 ‘0’을 찍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제2금융권에서 최고 대출 가능 금액이었던 2100만원을 대출받아 방향성 옵션 매매를 했다가 한 달도 안 돼 몽땅 날리기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투자자들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당시 저의 전화를 가장 관심 있게 응대해주던 분이 타워팰리스에 살고 계셨는데, 추석 선물을 전해주려고 로비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죠. 벤치에 앉아 그 집으로 배달되는 다른 비싼 선물들을 보는데, 내 선물이 하찮게 느껴져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그 투자자가 직접 지점에 찾아왔습니다. 결국 제가 세운 매매 전략대로 운용을 해보라고 허락하시더군요.”

그는 1억원으로 운용을 시작해 2억원, 5억원, 10억원으로 차츰 운용 규모를 늘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6년 3월, 한 회사의 회장이 운용 한도 100억원을 맡기기에 이르렀다. 그는 “다행히 성과가 계속 나면서 회사에서 줄곧 1등을 했고 2007년 가을쯤 빚도 모두 갚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다시 본사 트레이딩룸에 도전, 본격적으로 트레이딩업계에 뛰어들었다. 트레이딩업계는 모두 연봉 계약직이기 때문에 회사에 사표도 냈다. 옵션 매수 후 1개월 이상을 보유하는 포지션 트레이더를 전문으로 삼았다.

 NH농협증권 손우현 차장 /성형주 기자

“처음 한 달 성과는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데 2008년 2월 28일 중국발 쇼크로 증시가 급락하면서 기존에 벌어놨던 수익을 거의 다 날렸습니다. 일시적인 이벤트라과 생각했지만, 빨리 손실을 회복하려고 애쓰다가 순식간에 손실이 1억원까지 커지기도 했죠. 연 손실 한도가 3억원이던 때였습니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다행히도 1년 계약 기간 만료를 앞두고 4억원 플러스로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은 또 닥쳤다. 2010년 11월 11일 ‘도이치 쇼크’가 터진 것이다. 그는 당시 트레이더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었다고 말했다. 손 차장은 “그날 번 금액까지 포함해 동시호가 때 39억원이 날아갔다”면서 “그해에 내가 제일 좋은 수익률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충격은 엄청났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가 교보증권에 입사한 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회사 내부 수상자로 막 선정되려던 참이었다.

“도이치 쇼크로 사내뿐만 아니라 전 증권사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우리 부서는 5~6명의 트레이더가 파생으로만 연 100억원 이상을 벌 정도로 잘하던 팀에 속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저를 포함해 약 80억원의 손실을 봤으니 충격 그 자체였죠.”

당시 교보증권은 파생상품 트레이딩팀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손 차장은 퇴사를 결심했고 당시 받았던 당해연도 반기 성과급까지 자진 반납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개월 만에 S증권으로 옮겼다가 다시 NH농협증권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어찌 됐건 한 번에 40억원에 가까운 손실을 보았다는 게 주홍글씨처럼 낙인이 찍혀서 어디에서도 선뜻 나를 뽑아주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그는 NH농협증권에서 다시 재기에 성공했다.

“운용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사이즈 관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머니 매니지먼트’죠. 합창에서도 ‘포르티시모’와 ‘피아니시모’가 다 나와야 좋은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즈를 적절하게 쓰는 게 능력이죠. 언제 많이 들어가고 적게 들어가는지를 아는게 중요합니다.”

그는 지금 옵션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전략을 다 쓰고 있다. 레이쇼, 커버드 콜, 스프레드 뿐만 아니라, 스캘핑(초단타 매매)도 많이 한다. 방향성으로 매매에 나섰다가 전략 매매로 바꾸며 사이즈를 그때그때 조절한다. 그는 “운용도 결국 하나의 벤처라고 생각한다”면서 “뭔가 쉽게 되면 의심해봐야 하고, 안되는 걸 더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트레이더는 결국 창의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쪽 업계는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의사결정 몇 단계를 거치지 않고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아이디어를 스스로 많이 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는 최근 정부의 파생상품 양도소득세 부과 추진과 관련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국내 트레이더들의 실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본다”면서 “세금을 내야 하는 건 맞는데, 세금을 엉뚱한 방향으로 걷는 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양도세를 물리면 파생 거래가 확실히 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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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션이 너무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었습니다. 손님 돈으로 딜을 하니까 손실이 나도 손님과 협상을 잘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때는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제가 풋옵션을 잘못 매도한 거죠. 2000원 짜리가 다음날에 50만원까지 250배가 치솟았습니다. 제가 장중 대응을 했어야 했는데, 손절을 못했습니다. 손실이 3~4억대였죠. 지금으로 치면 10억은 될 겁니다.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이었습니다. 연봉이 5000만원도 안됐었죠.” 


 한양증권 최권식 부장 /이덕훈 기자

여의도 한양증권에서 만난 최권식 부장(37)은 “아마도 이 바닥에서는 다 한 번씩 죽다 살아난 고비를 겪었을 것”이라면서 “그런 일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껄껄 웃었다. 최 부장 자신도 어릴 때 옵션 대회에서 1위도 해보고 자신감이 넘쳤다가 된통 당했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옵션 시장에서 혼자 허파에 바람이 들면 절대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최 부장은 성균관대 경제학과 96학번 출신으로 2000년 군장교 입대 후 옵션을 처음 접했다. 당시 2001년 미국의 9.11 테러 사건으로 주가가 폭락, 풋옵션으로 500배가 넘는 수익을 거뒀다는 소문이 나면서 국내에서도 옵션 시장에 대한 관심이 꿈틀대던 때였다. 그는 “그때 군장교 가족들에게 알음알음 옵션 관련 강의를 해주면서 나도 겁 없이 옵션 시장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무턱대고 뛰어든 옵션 시장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받은 사망보험금을 몽땅 투자했다가 거의 다 날려버리기도 했다”면서 “빚을 갚기 위해 증권사에 입사원서를 내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2002년 군 제대 후 교보증권에 입사했다. 지점에서 투자자들의 위탁 계좌로 선물ㆍ옵션 계좌를 운용했다. 그러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사고’를 친 것이다.

“하필 제가 근무했던 지점이 옵션에 특화됐던 지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쓰나미’가 왔죠. 반 이상의 직원이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본사를 지원해보고 싶었는데, 지점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죠. 지금 생각하면 제가 옵션에 대해 요만큼만 알고 설쳤던 겁니다.”

이후 그는 투자자들이 위탁한 돈을 메우기 위해 투자자들을 일일이 설득했다. 그는 “지금은 날 고소하더라도 나는 줄 돈도 없고 무조건 기다려 달라고 했다”면서 “그러고 무조건 열심히 매매해서 겨우 1년반 만에 돈을 갚게 됐다”고 털어놨다.

 한양증권 최권식 부장 /이덕훈 기자

이후 2008년 그는 본격적으로 딜링업무에 도전했다. 최 부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제일 잘난 줄 알았는데, 딜링룸에 오니 정말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즈음해서 리먼 사태가 터졌고 그는 다시 법인 선물옵션부서로 옮겼다. 운용사들의 주문을 증권사가 위탁해 대신해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이번엔 ‘사건’을 저질렀다.

“2009년 12월쯤이었습니다. J사가 S사의 주거래고객이었는데, J사에서 제게 1조원짜리 주문을 내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날은 누가 봐도 매도우위 시장이었죠. 모두가 하락을 예상하는데 저는 그냥 매수 1조를 질렀습니다. 그야말로 동시호가가 뒤집어 진 거죠. 그때 저 때문에 칼 맞고 잘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저란 사람도 시장에 소문이 쫙 나게 됐죠.”

그는 선물ㆍ옵션 시장에서 승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자가 있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누군가가 이득을 얻으면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최 부장은 “그때 저는 회사에서는 평가가 좋아졌지만, 업계에서는 소문이 크게 안 좋아졌다”고 토로했다.

이후 그는 교보증권에 사표를 내고 2010년 다른 증권사로 이직했다. 아무래도 딜링 업무를 다시 하고픈 마음이 컸다고 한다. 한 증권사 상품운용팀에서 딜링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장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2010년 11월 11일, 도이치 쇼크때였죠. 그때도 엄청 좌절했습니다. 옆방에서 딜러 한명이 70억원을 까먹은 거죠. 그 증권사가 딜링부서를 철수해버렸습니다. 그때 딜러가 한 30명 정도 있었는데, 그야말로 와르르 나갈 수밖에 없었죠.

 한양증권 최권식 부장 /이덕훈 기자

그러다 2012년 최 부장은 다시 한양증권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나를 뽑아준 상무한테 나를 왜 뽑아준 거냐고 물어보니 그가 ‘너는 뭔가 목마름이 느껴졌다’고 하더라”라고 웃었다. 그는 “그때를 기점으로 다시 열심히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새벽 4시쯤에 일어나 6시에 출근, 오후 3시 장 마감까지 화장실도 뛰어갔다오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업계에는 아예 성인용 기저귀를 차는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술은 옵션 만기가 끝나는 날에만 먹는다.

“옵션은 일단 콜 위주로 매매합니다. 풋을 안 하는 이유는 9.11 테러 때 때문이죠. 풋은 잘못 만지면 독이 돼서 파산을 시킬 수 있습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거죠. 우리는 아무리 좋은 비율이 나와도 풋옵션은 잘 건드리지 않습니다. 합성전략을 쓸 때도 풋은 거의 안하죠. 수익이 크진 않더라도 큰 손실도 없습니다.”

그는 회사에서도 쉽게 말해 ‘옵션의 채권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옵션으로 높지는 않아도 꾸준히 수익을 내는 게 목표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추정 가능한 범위 내에서 예측 가능한 수익률을 내도록 노력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은 늘 찾아온다. 장이 결국 ‘큰손’ 외국인에 의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원래 생각해둔 손절매 일정 비율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격이 크게 틀어질 때가 있죠. 어떤 사람이 행사가를 만들기 위한 건지, 인위적으로 뭘 하는 건지. 그땐 속는 셈치고 다시 물량을 던져줍니다. 그래도 가격이 계속 크게 틀어졌을 때가 바로 9.11 테러 사태 때죠. 그럴 땐 고민을 해야 합니다. 물론 머리가 아니라 손이 먼저 가야 합니다. 생각하는 순간 가격이 이미 뜨고 있기 때문이죠. 대개 콜은 틀어지는 비율이 약간 공식화돼 있습니다. 풋은 거의 맘대로죠. 이걸 움직이는 이는 결국 돈이 많은외국인 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냥 피해 줄 수밖에 없죠.

그는 결국 트레이더도 ‘정신 수양’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고 소신껏 매매를 하더라도 결국 리스크 통제를 위한 건전한 마인드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추어는 ‘뭐 때문에’라고 말하지만, 프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으로 대합니다. 아무리 리스크가 커도 도 닦는 분위기로 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요가나 참선, 이런 걸 하는트레이더들도 많습니다. 결국 스킬은 한장 차이죠. 리스크를 되도록 피하는 사람이 리스크를 가져가는 사람보다 롱런하고 수익률은 적어도 더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최 부장은 최근 정부의 파생상품 규제 강화 움직임에 대해서는 소신 있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사실 파생상품시장이 어려워진 게 꼭 옵션 승수제 때문은 아니라고 본다”면서 “거래량은 줄었지만, 거래대금은 꼭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체적으로 우리가 옵션 승수 인상 직전 1년과 직후 1년을 조사해보니 거래량은 5분의 1로 줄었는데, 거래대금은 크게 줄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파생시장이 위축되기 시작했는데, 이를 정부가 파생 신상품을 늘리고 주식 거래시간을 연장하는 등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전반적인 파생상품 시장의 규제를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 불법 XXX의 병폐 문제도 해결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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