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청빈한 신앙의 터전 하와이
거실 겸 부엌 하나에 방 두 칸의 목조주택
요양병원으로 옮기기 전 1년4개월 기거
그가 세운 무교파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자유 독립의 대한민국을 잉태한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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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이 1960년 12월부터 1962년 3월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1년4개월간 기거했던 하와이 마키키 스트리트 2033번지 윌버트 최씨의 목조 주택. 오른쪽 사진은 지난 2022년 촬영된 미국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이 교회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과 1918년 설립한 무교파 한인교회로 1938년 광화문을 본뜬 예배당이 건립됐다. 흑백사진은 복원되기 전의 옛 한인기독교회 연합뉴스 |
하와이 마키키 스트리트 2033번지 목조 주택은 이 박사의 거처를 요양병원으로 옮기기 전 1년4개월간 기거했던 마지막 주택이었다. 거실 겸 부엌 하나에 방 두 칸으로 비탈길 옆에 지어진 집이어서 위쪽에서 보면 단층이지만 아래쪽에서 보면 2층이기도 했다. 아래쪽에서 보이는 1층엔 창고 같은 자투리 공간 하나가 있었다. 오중정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마키키의 작은 집. 아주 쬐그만 집. 마당까지 해서 30여평이나 될까? 일층은 지하실까지 해서 창고 같은 방이 하나. 뒤에는 작은 뜰이 있었고, 이층에 사방 3m가 조금 넘을까 하는 침실이 두 개, 그리고 부엌 하나. 그뿐이었어요. 이 박사는 거기서 신문지를 갖다 놓고 붓글씨를 쓰시곤 했지. 지금도 이 집은 있지만 수리를 해서 조금 모양이 변했지요."
마키키의 집으로 이사할 때 동포들이 가져다준 가구 중에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조립식 식탁도 거실에 놓여 있었는데, 현재는 이화장에서 볼 수 있다. 가로 120㎝, 세로 90㎝ 되는 포마이카 식탁은 3등분으로 접을 수 있는데, 건국 대통령 부부가 식사 때마다 성경 구절을 읽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진심 어린 감사와 나라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던, 두 분의 예배당 겸 식탁이었다.
오늘날까지 이 박사 부부의 청빈한 신앙 생활을 신학적이나마 제대로 연구한 성과물이 없다는 것에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불교와 유교를 벗어나 기독교로 개종한 이래, 그의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나 가족의 복리를 위한 기복적인 기도를 올려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이타적 기도를 드린 참다운 신앙인이었다.
기도(聖)만이 아니라 그의 삶(俗)이 그러했다. 1913년 미국 감리교단의 요청으로 하와이 한인기숙학교 교장이 되기도 했지만, 이승만의 한국인을 위한 한국어와 한국사 교육에 감리교단이 제동을 걸자 이승만은 과감하게 미국 감리교단과 단절했다. 그리고 1918년 한인들끼리 힘을 모아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했다. 무교파(無敎派) 자치교회인 '하와이 한인기독교회(Hawaii Korean Christian Church)'가 그것이다.
1938년 신축한 예배당은 건물 외부를 광화문을 본떠 지었지만 외부에는 십자가 하나 걸지 않았다. 십자가를 외부로 내걸지 않은 이 교회야말로 이승만의 종교철학이 스며든 '민족교회'였다. 교세 확장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나라를 되찾기 위한 교회였다. 그런 이승만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교민들이 신도가 되었고 조직원이 되었으며 이승만의 독립자금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 신도들은 이 교회를 '자유 교회' '독립 교회'라고도 불렀다. 이승만이 세운 교회는 자유 독립의 대한민국을 잉태한 산실이었다. 이승만이 가장 좋아했던 성경 갈라디아서 5장1절의 "두 발로 굳건히 서서, 두 번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는 말씀처럼 무교파의 한인기독교회는 독립정신의 칼날을 세운 곳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그를 위한 기념관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지만, 정작 그의 종교적 태도를 본받기 위한 노력은 같은 종교계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정신을 살린 무교파 교회, 자유 교회, 독립 교회를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성(聖)과 속(俗)의 관계 정립을 이승만은 평생에 걸쳐 몸소 실천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그의 삶 속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또다시 구한말과 같은 위기 상황으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되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노년에 이른 이승만의 신앙 생활이 감동적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푸른 눈을 가진 25살 연하의 프란체스카가 함께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립식 포마이카 식탁에서 이 박사는 식사 때마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고, 아침마다 서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들이 사는 데야" 하고는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아니 식사는 안 드실 생각이세요" 하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주의를 환기하면 매우 못마땅한 듯이 "왜?"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는 회고록에서 "우리 생활은 단조로웠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를 도와주는 동지들과 제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썼다.
"단 두 식구가 사는 간단한 살림이었지만 나는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일했다. 나는 집안을 청소할 때마다 창문의 유리를 두 장씩 닦아 나갔다. 그렇게 하면 1주일이 지나는 동안 닦아야 할 집안의 유리 창문은 모두 나의 손을 한 번씩 볼 수가 있어 깨끗한 창문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넓지 않는 마당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고 나무에 손질을 하며 마음속의 시름을 달랬다. 대통령은 이때에도 무슨 음식이나 잘 들었고 체중이 주는 일도 없었으므로 나는 항상 과식을 삼가도록 배려했다. 체중이 늘면 고혈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특히 노인의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보행을 위해 매일 시간을 정해 옥외로 함께 나가 산책을 했다. 이렇게 1960년 한 해를 하와이에서 넘기게 되자 1961년 설날, 나는 떡국을 끓여 대통령에게 아침 식사를 들게 했고 친지와 교포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세배를 와서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25년 연상의 동양 노신사를 만나 12년간의 독립운동, 12년간의 퍼스트 레이디, 그리고 유배지 하와이에서의 5년2개월간 병구완을 해낸 아름다운 여인 프란체스카를 잠시 만나러 가보자.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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