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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0일’ 우장춘 박사 별세…매국노가 낳은 애국자[그해 오늘]

이데일리 2022.08.10 00:03 댓글 0

- 을미사변 가담한 친일파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
- 도쿄대 농학박사돼 해방조국 식량난 해소 기여
- `부친의 친일 속죄하려면 조국에 봉사해야` 다짐
- 일본서 조선인, 한국서 매국노 자식으로 차별 인생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 잡배의 칼에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경복궁 빗장이 쉽게 풀인 데에는 조선인 조력자 역할이 컸다. 대표 인물이 조선군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이다. 여러 매국 행위는 차치하고, 살해된 명성황후 얼굴을 보고 신원을 확인한 인물로 기록된다. 사변 이듬해 우범선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거기서 부인을 만나 자식까지 뒀으나 말년은 비참했다. 늘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실제로 살해당해 생을 마감했다.

우장춘 박사.
부친을 여섯 살에 여읜 우범선의 아들은 총명했다. 1898년 일본에서 나고자라 1916년 도쿄제국대 농과대학에 입학했다. 학적부에 올린 그의 이름은 우장춘. 훗날 해방 이후 대한민국 농업의 토대를 닦은 우장춘 박사다.

박사는 일찌감치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쿄제국대 박사 학위를 받은 1935년 발표한 논문(Triangle of U)은 그에게 명성을 안겼다. 그럼에도 학계에서 요직이 아닌 한직을 돌았다. 조선인 출신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결국 1937년 기업으로 옮겨가 연구를 이어갔다. 이 와중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항복을 선언했다.

해방된 대한민국은 우장춘 박사 귀국을 추진했다. 직면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면 농업 생산량을 끌어올려야 했다. 육종과 육묘를 아는 인재가 필요했다. 우 박사가 적임자였다. 그는 일본의 갖은 회유를 뒤로한 채 1950년 한국 땅을 밟았다. 언젠가는 조국에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귀국은 대학 시절 만난 한국인 유학생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친구인 김철수 영향이 컸다. 그로부터 부친의 매국 행적을 접했다. 속죄하려면 조국에 봉사하고 성씨를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일본 국적이면서 조선인으로서 냉대를 받으면서까지 성씨를 바꾸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

젊은 시절 우장춘 박사.(사진=농촌진흥청)
귀국 첫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입대해 소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초대 중앙원예기술원장(1953~1957년)과 초대 농사원 원예시험장장(1957~1959년)을 지냈다. 농업 생산량을 끌어올리고자 주력했다. 외국 종자가 한국 환경에서도 잘 자라게 개량하는 데 애썼다. 벼와 감자, 무, 배추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자라났다. 남부와 제주 지역에 감귤 재배를 시도해 지금의 산업 기틀을 닦았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육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씨 없는 수박 얘기를 했던 게 와전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생활도 일본에서처럼 쉽지 않았다. 서투른 한국어 탓에 일본인이라는 오해를 샀다. 일본에서는 조선인이라고 차별을 받았는데 마찬가지였다.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도 붙어 다녔다. 일본에 두고 온 모친이 사망했으나 빈소를 지키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해 출국을 금지했다.

1959년 8월1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세.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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