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누의 이요만테(熊祭)
일본열도 주류를 이뤘던 아이누
사냥 나가 새끼곰을 발견하면
집으로 데려와 수유하고 돌본다
3~4년 후 길일을 잡아 웅제 지내
동네사람들은 가무로 영접하고
곰신이 남긴 고기를 함께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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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인과 곰의 씨름'이란 제목의 토제 인형. 1897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박람회에 출품됐던 작품으로 아이누의 다리와 손등에도 체모를 표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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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97년 일본 오사카 국립민족학박물관에서 개최됐던 아이누의 웅제(熊祭) '이요만테'에 제주 역할로 참가한 아이누 출신 참의원 카야노 시게루(1926~2006). |
육당 최남선(崔南善·1890~1957)의 저술 중에는 탐라어의 기원에 관한 두툼한 논문이 있다. 제주도와 아이누를 연결시킨 작품이다. '제주도의 문화사관'이라는 제목인데, 아이누의 형적과 영향으로 분석한 글을 '매일신보'에 연재한 때는, 그가 만주의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기 직전이었다. 오키나와 사람을 일본인의 아류로 간주했던 일본 인류학계가 '문명과 야만'의 관점하에서 아이누를 다른 집단으로 분류했지만, 사실상 일본열도에 '왜'(倭·矮)라고 불린 집단이 정착하고 형성되기 이전에 주류를 이루었던 선주민이 아이누였다. 육당의 시선은 서일본의 구주 지방에서 한발짝 더 연장되었고, 아이누가 제주도까지 정주권역으로 삼았음을 가정하였다. 그것을 증명하는 시도로 제주도에 남은 지명과 아이누어를 연결시켰다. 석주명(石宙明·1908~1950)이 남긴 논고와 함께 제주도의 언어에 관한 가설은 빙하시대에 전파되었던 아이누어와 퇴빙(退氷) 및 해진(海進)과 함께 북상한 말레이어가 층화현상을 이룬다는 가설이 나의 얘기다.
1920년 육당의 감방으로 면회를 왔던 시카고대학의 인류학자 프레데릭 스타가 있었다. 아이누 연구의 선구자인 존 배철러(1854~1944)는 북해도를 방문하였던 스타 교수를 안내한 적이 있고, 그로부터 인류학적 혜안을 배웠다는 증언을 남겼다. 따라서 육당의 제주도와 아이누의 관련성에 관한 생각은 스타 교수로부터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류 발자취의 시선이 이동 역사의 반대인 서쪽을 향하는 것은 육당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가 1931년 5월 히라도(平戶)에서 소형 목선을 빌려 서쪽의 오도열도 북쪽에 있는 오지카지마(小値島)를 방문했다. 그때 채집한 내용인 '고려도의 전설'이 출판되었다. 오지카에서 서쪽으로 4리 정도의 바다에 비료우도(美良島)라는 무인도가 있고, 그 섬의 평지에는 기왓장들이 흩어져 있었다. 여기서 다시 3리 서쪽에 코라이세(高麗瀨) 또는 코라이소네(高麗曾根)라고 불리는 암초군이 있다. 과거 침몰되었던 고려도다. 어부들은 인근 해역에서 심심치 않게 그릇과 기왓장을 건져 올린다는 보고를 했다. 오지카지마의 북편에 있는 우구시마(宇久島) 여인들은 섬의 산정으로 올라가서 매년 180㎞ 떨어진 서쪽의 한라산을 향하여 제사를 지낸다.
성공회 선교사였던 배철러는 아이누의 전설을 수집해 언어를 연구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이누어-일본어-영어사전을 만든 것이 후일 아이누 연구자들의 기초가 되었다. 아이누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신들을 '엠츄'(emchiu 또는 enju)라고 불렀는데, 미칭인 '아이누'(장자 또는 영웅이라는 뜻)라는 말이 일본인들에 의해서 일반화되었다. '엔주'는 사할린 아이누에서 사용되었고, '엔주'가 '엠츄'보다 고어에 해당한다.
아이누의 습속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게 연구된 항목이 '이요만테'라는 웅제(熊祭)다. 곰 토템의 신앙이다. 웅제의 분포는 시베리아와 알라스카의 툰드라에 걸치고, 남시베리아에는 곰 신앙이 없다. 목축과 곰의 상극관계에서 비롯된 것일게다. 곰이란 동물에 대해서 어떠한 신앙과 사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이해해야 할 대목이다.
배철러의 사전에 '키문카무이(熊神)'라는 항목이 있다. '키문'이 곰이고, '카무이'는 신이다. 일본어로 곰은 '쿠마', 신은 '카미'. 즉 아이누어-일본어-한국어로 적으면 '키문=쿠마=곰'이다. 알타이계의 퉁구스어를 근간으로 하는 동일계통임을 보여준다.
아이누가 겨울에 사냥을 나가면, 간혹 새끼곰을 발견하는 수가 있다. 신의 강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끼곰을 귀하게 모시고 집으로 온다. 어린 곰을 안고 수유하는 아이누 부인의 그림이 연구자들에게는 호기심의 으뜸이다. 가족이 정성스럽게 돌본 곰은 성장하면서 별도의
우리로 옮겨진다. 3~4년 정도 지난 뒤 길일을 받아서 웅제를 지낸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인간의 세계로 강림하신 신을 그들의 본령으로 보내는 아이누의 가장 큰 축제다. 신의 강림과 승천의 질서가 반복한다는 우주론이다.
행제를 위한 목기들을 새롭게 마련하고, 제단을 만들어서, 동네 사람들이 가무로 영접하는 의식을 치르는 가운데 목줄에 끌린 곰이 우리 밖으로 나온다. 네댓명의 사냥수가 활을 겨누어 곰을 죽인다. 이 과정에 대해서 근대화의 물을 먹은 사람들이 접하는 오해가 있다. 죽인다는 행위가 어떻게 해서 보낸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항의다. 아이누가 곰신을 '보내는' 방법이 외부인의 눈에는 죽이는 행위로 보일 뿐이다. 그것을 상징이란 단어로 포장하게 되면, 전혀 다른 인식오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외부인의 눈으로 확인된 현상의 이면에 담긴 내용에 아이누 사람들의 또 다른 인식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세계관의 기본구도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언어인류학에서 발전시킨 내관(內觀·emic)과 외관(外觀·etic)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문화이해란 이렇듯이 인간인식의 심원에 도전하는 영원히 불가능한 '상대방의 입장됨'을 전제로 한다.
한반도와 북해도 사이의 연해주에는 '우데게'(또는 우디허)라는 사람들이 산다. 프리모르스키주의 광범위한 영역이다. 이들의 조상 신화가 단군신화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와 세종대에 이들을 '우지개'라고 기록하였고, 그들의 변경 침략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여진과 우지개의 관계가 궁금해진다. '울릉도포럼'에 참석했던 블라디보스토크 학술위원회의 고고학자는 "코리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우데게"라고 전하였다. 우데게 사람들도 아이누와 흡사한 내용의 곰신을 모시고, 아이누의 이요만테와 동일한 형식으로 웅제를 지낸다. 곰신께서 육신으로 남긴 고기를 마을사람들이 함께 나눈다. 가톨릭 성당의 성체성사를 하는 과정과 동일한 내용이다. 제사의 끄트머리에 행하는 음복(飮福)이다.
언어학자 킨다이치 쿄스케(金田一京助)로부터 배운 아이누 후예인 치리 유키에가 '카무이유카라'를 '아이누신요집'(1923년)이라는 이름으로 전하였다. 곰을 중심으로 한 동물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아니미즘 신앙은 알래스카의 이누이트에게서도 보고되었다. 한반도 선사시대 사람들의 반지하수혈주거는 툰드라에 펼쳐진 북해도의 아이누와 알래스카의 이누이트에서도 동일하였다. 뮌헨대학의 한스-요아힘 파프로쓰가 저술한 '퉁구스족의 곰의례'(1976년)가 이 방면의 금자탑격 저술이다. 이누이트 사람들의 싸우는 방식은 각자의 지붕에 올라선 상대를 향하여 노래를 부르고, 이웃들이 승패를 판정한다. 아이누어로 노래싸움을 '차랑게(charange)'라고 한다. K팝의 미래를 위한 힌트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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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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