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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균 경제부 부장 |
고 이어령 선생(1934~2022)이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늑대가 두려워하는 강한 사슴이 되고 사자가 무서워하는 강한 양이 되자는 거요. 아니 먹히고 나면 무슨 사슴의 고귀함이 있고 무슨 양의 착함이 있겠나 이거요. 그러니까 강과 약을 다 가져야 합니다." ('이어령의 말')
한미 관세협상을 마무리한 산업통상부 장관 김정관은 지난 4일 국무회의에서 "아직도 개운하지 않고 씁쓸함이 남아 있다"고 했다. "협상 자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해 기울어진 정도를 제가 약간 해소하는 데 그쳤다"고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터프하다'는 평을 얻은 김정관의 씁쓸함이란 무엇일까. 겸양은 아닐 것이다.
반년여간의 드라마틱한 대미 관세협상이 타결됐다. 되짚으면 우리는 트럼프가 관세 15% 조건으로 요구한 '선불(up front)' 3500억달러(약 506조원) 중에 2000억달러를 '할부'로 내기로 했다. 연간 한도 200억달러(29조원) 10년 약정 할부다. 외환보유고(4200억달러)를 굴려 낸 수익을 기초로 미국에 줄 돈을 장만한다. 모자란 돈은 정부가 국채를 발행한다. 미래 세대의 자산을 미리 당겨쓰는 '가불' 격이다. 나라재정에 미칠 부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원금을 우리가 내지만 투자수익은 한미가 5대 5로 나눠 갖는다. 20년 안에 원리금을 회수한다지만 미국 말고 다른 곳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잃는 것이다.
합의대로라면 이재명 정부와 다음 정부에서 1000억달러씩 미국에 보낸다. 김정관은 "미국에 그냥 주는 돈이 아니다. 우리 기업들이 활용해 혜택이 돌아가도록 할 것"이라며 안심시키는데, 나는 미국이 보여준 태도로 봐서 100% 신뢰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차" 싶다. 연 30조원에 가까운 1년치 대미 할부금은 내년 한 해 사회간접자본(SOC) 예산(27조원)보다 많다. 현 정부가 초혁신경제로 앞세운 인공지능(AI) 투자액(10조원)의 3배다. 내년 국가의 연구개발(R&D)사업 예산(35조원), 1년치 국채 이자(36조원)에 육박한다.
총액으로는 경기 용인 등에 10여년 프로젝트로 건설 중인 세계 최대 반도체클러스터에
삼성전자(360조원)와
SK하이닉스(122조원)가 투자하는 돈보다 많다. 이것의 경제효과가 직간접 고용유발 300만명, 생산유발 900조원에 이른다. 이런 큰 국부가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김정관이 "씁쓸하다"고 한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반론도 있다. 미국과의 관세를 풀지 않고 대치했을 때 우리가 잃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가. 나라경제에 300조원 이상 기여하고 150만명을 직간접 고용하는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상실하는 것이 국부손실 아닌가. 우리 기업·근로자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해 밸류체인을 확장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들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땅이 아닌 미국 땅에 있는 것이고, 우리 청년들이 모두 거기서 일할 수도 없다.
대미 할부가 끝나는 10년 후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80%에 육박할 것이다(올해는 49%). 생산연령인구(2035년 3100만명)가 더 줄고 잠재성장률이 더 떨어져 1% 언저리에 있을 것이다. 미국에 투자하느라 중국에 쫓기느라 국내 제조업은 텅 빌 것이다. 미국은 잃어버렸던 반도체 등 첨단산업 밸류체인을 자국에 재건할 것이다. 미중 사이에서 오로지 한국만이 갖는 그 무언가가 얼마 남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길이다. 500조원 넘는 돈을 미국이 손에 쥐고 쓴다는 전제로 한국의 투자·생산·일자리를 위한 산업전략을 완전히 다시 짜야 한다. '터프한 협상가' 김정관이 치밀한 전략가가 돼야 한다. '제조업 르네상스(2030년 세계 4대 제조강국 도약)'와 같은 미사여구도 집어치워라. 도리어 본질을 훼손한다. 이어령 선생의 일침대로 늑대가 두려워하는, 사자가 무서워하는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skjung@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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